16일 늦은 오후 충남 공주 제민천. 늘어지게 연결된 전구들이 밝은 빛을 발한다. 노란 빛줄기를 따라 걸어가다 보면 낮은 건물들 사이로 교회가 눈길을 붙잡는다. 붉은빛을 띤 건물 한편에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초라한 초가 한 동이 이웃과 지역으로 그 가지들 펼쳤고, 배움과 나눔 그리고 3·1 독립운동과 구국과 애국의 민족 지사 되었으니 아름답고 복된 신앙의 결실이어라. 흙 한 줌 벽돌 한 장이 그 생명과 헌신, 땀과 눈물이 담긴 그리고 자신의 몸을 드리는 향기로운 제물이 되었으니 아! 생명의 거룩함이여 찬양하라. 그리고 함께 영원하리라.’
교회를 세울 때 상당한 기부금을 전달한 익명의 ‘옆구리에 우산을 끼고 온 사람’을 기념하고자 새겼다고 한다. 공주제일교회(윤애근 목사) 이야기다.
교회 기독교박물관 입구에 들어서자 박보영 기독교박물관 부관장이 교회가 걸어온 여정을 풀어가기 시작했다. 공주시와 공주문화관광재단이 마련한 역사 소개 프로그램 ‘신실한 밤’에 빠져드는 시간이었다.
공주제일교회는 수원 이남 지역의 최초 감리교회다. 1903년 미 북감리교에서 파송된 의사 출신의 맥길(1859~1918) 선교사가 이용주 전도사의 도움을 받아 세운 곳이다.
맥길 선교사가 귀국한 뒤 로버트 샤프·사애리시 샤프 선교사 부부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부부는 최초 서양식 건물을 짓고 선교 활동을 펼쳐나갔다. 명설학교를 비롯해 영명고등학교의 전신인 영명학교를 설립해 교인들을 가르쳤다. 1919년 이후 한국인 목회자를 세우고 유치원과 병원을 경영하면서 주민들과 더불어 살아갔다.
공주제일교회를 얘기할 때 유관순(1902~1920) 열사를 빼놓을 수 없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유관순은 당시 교회를 맡은 사애리시 선교사의 배려로 1914년 공주 영명여학교를 다녔다. 사애리시 선교사는 당시 “유관순양이 공부하길 원하면 제가 서울 이화학당에 보내줄 테니 우선 영명학교에서 교육을 받아보는 게 어때요?” 그렇게 유관순은 이화학당에 전액 장학생으로 전학했고 방학 때마다 공주에 내려와 문맹 퇴치에 앞섰다.
1919년 조선총독부가 휴교령을 내리면서 유관순은 고향 천안으로 내려가 만세운동에 참여했는데, 3·1만세운동 중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교회는 ‘빼앗긴 들에도 봄을 오는가’를 지은 시인 이상화(1901~1943)와 청록파 시인 박목월(1915~1978)이 결혼식을 올린 장소로 역사적 의미가 깊다. 두 시인 모두 교회를 다니던 여인들과 결혼했다.
특히 목월은 어머니로부터 신앙을 물려받고 아내 유익순(1920~1997) 여사와 함께 신앙을 키워갔다. 생전에 여의도순복음교회(이영훈 목사)가 발간하는 기독교 월간지 ‘신앙계’에 축하시를 싣기도 했다. 사후 유 여사가 목월의 유고 중에서 기독교적 색채가 드러나는 시들을 따로 모아 시집 ‘크고 부드러운 손’을 펴내기도 했다.
공주에는 기독교를 비롯해 독립운동을 펼쳤던 애국지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17일 4·1공주읍만세운동 길을 따라 걷다보니 영명고등학교를 만났다. 조금 걸어 들어가자 구 선교사 가옥과 유관순·사애리시 로버트 선교사의 동상이 순례객을 맞이했다. 선교사 부부와 자녀들의 무덤도 인근에 있는데 공주시는 이를 바탕으로 종교관광 순례길을 조성할 계획이다.
박 부관장은 “공주 지역에서 선교사를 제외하면 근현대사를 논할 수 없을 정도”라며 “공주시는 현지 교회들과 함께 순례길을 조성하고 있다. 종교적 의미를 넘어 지친 이들에게 휴식과 같은 길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공주=글·사진 김동규 기자 kky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