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디딤돌 걷어낸 정부

입력 2024-10-18 00:36

며칠 전 지인에게 전화가 왔다. 디딤돌이 막혔다고 했다. 12월 초 신축 아파트 입주를 앞둔 그는 디딤돌대출로 잔금을 치를 계획이었다. 한 달 전만 해도 문제가 없었는데 갑자기 은행에서 대출이 안 나올 수 있다고 했다고 한다. 그는 정책대출인데 정부가 사전 공지나 설명 없이 막무가내로 이렇게 해도 되느냐고 울분을 토했다.

디딤돌대출은 무주택 서민이 5억원 이하 집을 살 때 이용하는 대표적인 정부 정책대출이다. 알아보니 국토교통부와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시중은행에 디딤돌대출 취급 제한을 요청했다고 한다. 소액임차보증금 공제를 필수로 적용하고, 후취 담보로 진행되는 신규 아파트 디딤돌대출을 더 이상 취급하지 말라는 게 내용이었다. 생애최초주택 마련에 대해선 현재 담보대출비율(LTV) 80%를 70%로 낮춰 혜택을 줄이는 내용도 포함됐다.

국민은행이 가장 빠르게 반응했다. 지난 14일부터 디딤돌대출을 제한하고 있다. 다만 실수요자들의 불만이 잇따르자 다른 시중은행과 마찬가지로 21일부터 조치에 들어가는 것으로 변경했다. 지인은 국민은행에 갔다가 관련 내용을 들었다. 현재 그는 집단대출을 알아보고 있다. 지인은 “지난달까지만 해도 인근 아파트 집단대출 금리는 3.4% 정도였는데, 최근 옆 아파트는 4.8%까지 올랐다. 디딤돌대출은 2%대였다”며 한숨을 쉬었다.

“지금 실수요자들 난리 났다”는 말에 오픈 채팅방에 들어갔다. 벌써 800명 넘게 모여 있었다. 대부분 “디딤돌 막혀서 답답해서 들어왔다”는 사람들이었다. 몇몇은 국민신문고에 ‘디딤돌 규제와 후취 담보 제재, 원상복구 및 규제철회 요청’이라는 제목으로 민원을 올리기도 했다. 채팅방에 있는 한 예비 차주는 “몇 달 전만 해도 서민 실수요 대출은 건드리지 않겠다고 해놓고 유예기간도 없이 하룻밤 사이 이러는 게 어디 있느냐”고 했다.

정책금융 공급 조절이 필요하다는 얘기는 가계부채 문제가 불거진 이후 계속해서 나왔다. 주담대를 중심으로 가계대출이 급격히 늘어난 지난 7~8월에도 가계부채 폭증을 정책대출이 이끄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지만 정부는 서민 주거안정 지원을 이유로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공급 중단 시 서민 주거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랬던 정부가 하필 지금 이 같은 조치를 꺼내든 건 왜일까. 국토부는 “기존에 있는 규정을 제대로 지키고 대출한도 확대 등을 자제해 기금 안전성을 유지하려는 취지”라고 설명했지만 뭔가 궁색하다. 입주를 앞둔 사람이 디딤돌대출이 막힌다고 계약을 포기할까. 그럴 리 없다. 금리가 높은 일반 주담대를 받거나 다른 방법을 강구할 것이다. 결국 조건만 안 좋아질 뿐이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디딤돌대출이 정부의 가계부채 규제 효과를 상쇄시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 은행들의 주담대 잔액은 순감하는데, 디딤돌대출 등 정책대출 접수분이 많아 전체로 보면 그 효과가 미미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때문에 디딤돌대출의 주목도는 커졌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안도걸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지난해부터 올해 8월까지 은행권 주담대의 73%가 정책대출이었다. 정책대출 중에서도 디딤돌대출은 금리 인상 등으로 잔액 기준 16조원 가까이 줄인 보금자리론(금융위 소관)과 비교되며 가계부채와 주택가격 급상승의 주범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정책대출이 집값 상승의 직접적 원인은 아니다”며 정책모기지 대상 축소 등에 선을 그어왔던 국토부로서도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정부 가계부채 관리 정책의 효과를 위해 국토부가 디딤돌을 걸림돌마냥 걷어낸 건 아닐까.

황인호 경제부 기자 inhovato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