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세 뒤집고, 지지세 굳히기
수단으로 ‘맞춤형’ 조사 동원
명태균씨 관련 ‘여론 조작설’
검찰 수사로 철저히 규명돼야
정치권·선거당국·언론 다 책임
조작 엄단하는 입법 서둘러야
수단으로 ‘맞춤형’ 조사 동원
명태균씨 관련 ‘여론 조작설’
검찰 수사로 철저히 규명돼야
정치권·선거당국·언론 다 책임
조작 엄단하는 입법 서둘러야
정치권에선 특정 후보의 선거 캠프나 여론조사업체 관계자가 기자들한테 “단독으로 알려줄 테니 참고하라”며 여론조사 결과를 내미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선거 흐름을 바꿀 만한 내용이 담겨 있어 뉴스거리가 되고, 단독이라는 당근도 있어 일부 기자들은 혹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게다가 오차범위, 조사인원 할당 비율 등 겉으로 보기엔 조사로서의 기본요건을 갖춘 데이터면 더더욱 흔들리게 된다.
그런데 이런 자료는 꼭 보도하지 않아도 효과를 발휘한다. 자료를 본 기자들이나 선거 캠프 관계자, 당직자들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입소문을 내기 때문이다. “비슷비슷했는데 아무개 후보가 1등으로 치고 나가기 시작했다더라. 실제 그걸 뒷받침하는 여론조사가 나온 걸 봤다”는 말이 퍼지면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진짜 그런 줄 안다. 그게 일반 당원들한테까지 쭉 퍼지면 대세를 형성하게 된다. ‘선점 효과’ 또는 ‘밴드왜건 효과’(bandwagon effect)를 노린 것인데, 눈에 띄는 달라진 흐름이나 기존 흐름이 점점 확실하게 굳어져갈 때 다들 거기에 편승하려는 경향을 말한다. 가령 유권자들이 누굴 지지할지 망설이다 지지율이 뚜렷이 앞서 나가는 후보가 나타나면 덩달아 같이 지지하게 되는 상황이다.
지금 여권을 발칵 뒤집어놓은 선거브로커 명태균씨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것도 이 부분이다. 명씨 사건과 관련해 ‘여론조사 조작설’이 계속 불거지고 있는데 명씨가 그런 여론조사로 이루려던 목적이 이처럼 상황을 왜곡시켜 놓고 엉뚱한 밴드왜건 효과를 만들어내려던 게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일례로 명씨는 2021년 3월 당시 윤석열 검찰총장이 막 물러났을 무렵 대선 예비후보 지지율 조사를 내놨는데 윤 후보가 41.2%,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20.5%로 2배 앞선 결과였다. 당시 한국갤럽 조사는 두 후보 모두 지지율이 24%였다. 또 윤 후보와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갈등을 빚어 여론이 안 좋을 때인 2021년 8월 갤럽은 이 후보(25%)가 윤 후보(19%)를 앞선 조사를 발표했지만 명씨 조사에선 윤 후보(34.0%)가 이 후보(25.7%)보다 지지율이 높았다.
행여 조작된 조사 결과가 윤 후보가 안정적으로 정치권에 들어오고 여당 유력주자로 자리잡는 데 ‘재료’로 쓰였다면 반칙일 것이다. 단순히 명씨가 윤 후보 마음을 얻는 ‘영업수단’으로만 썼는지, 아니면 윤 후보 진영이 국민의힘 안에서 윤 후보의 존재감을 어필하는 논거로 조사를 활용했는지는 아직 모른다. 그렇기에 향후 검찰 수사 등을 통해 여론조사가 나오게 된 과정에 불법이나 조작이 없었는지 규명돼야 한다.
명씨 조작 의혹과 관련해선 홍준표 현 대구시장이 최근 “대선 경선 당시 윤 후보한테 유리한 조사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냥 내버려뒀는데 그게 나중에 당원 투표에 영향을 끼칠 줄은 몰랐다”고 말한 바 있다. 당원들 사이에서 조사 자료가 돌아다니거나 입소문으로 퍼지면서 실제 경선에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이다. 또 얼마 전 뉴스토마토에서 명씨가 2021년 9월 조사업체 직원과 통화하면서 “윤 후보가 홍 후보보다 2% 앞서게 해 달라”고 주문하는 녹음파일이 공개되기도 했다. 명씨는 ‘보정’ 지시였지 ‘조작’ 지시는 아니라지만 이 역시 규명이 필요하다.
명씨와 엮인 다른 여권 인사들 가운데 혹시 이런 유형의 ‘맞춤형 여론조사’의 도움을 직간접적으로 받은 이들이 없는지도 수사해야 한다. 만약 그런 맞춤형 주문을 하거나 건네받은 조사가 불량품인 걸 알고 활용했다면 ‘공모’에 해당할 수 있는 사안이다. 명씨가 보통 사람들은 만나기 어려운 유력 인사들과 폭넓게 인맥을 형성하고 ‘명 박사’ ‘명 선생’으로 대접받는 데 활용된 ‘무기’가 뭔지 밝혀야 한다.
명씨 사건이 어떻게 결론이 날지는 더 두고봐야겠지만 이번 일은 명씨나 여당만의 문제라고 치부할 사안이 아니다. 그간 숱한 여론조사들 속에 불량품을 골라내는 일을 게을리해온 모든 당사자들한테 잘못이 있다. 여론조사를 소홀히 감시해온 선거 당국은 물론, 내부 자정을 하지 않은 여론조사업계, 그런 조사에 현혹돼 밀월을 즐긴 정치권, 경마식 보도에만 급급했던 언론사가 함께 빚어낸 총체적 무책임의 산물이다. 뒤늦게마나 정치권이 ‘명태균 방지법’을 만든다고 하는데, 입법에 속도를 내야 할 것이다.
손병호 논설위원 bhs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