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려 선생을 기억하는지요. 많은 이들은 장기려 선생을 이산가족의 아픔을 겪은 분으로, 북에 두고 온 아내를 그리워하며 평생 혼자 살아간 분으로 기억합니다. 남북 간에 화해 분위기가 조성될 때 선생에게 북한의 가족을 만날 특별한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북한 정부도 환영한 일이어서 얼마든지 가능했음에도 선생은 끝내 거절합니다.
“다른 사람이 모두 다 가지 못하는데 내가 어찌 특별대우를 받아 가겠느냐. 모두 갈 수 있을 때 나도 가야지.”
이를 주선하고 들뜬 마음으로 소식을 전했던 현봉학 박사는 ‘이렇게 훌륭한 분이 또 있을까’라며 눈시울을 적셨다고 합니다. 최근 읽은 ‘장기려 평전’에는 막연하게 알던 선생의 구체적 모습과 그 시대의 다양한 모습이 꼼꼼히 기록돼 있어 여러 가지를 새롭게 생각하게 했습니다.
‘한국의 슈바이처’ ‘바보 의사’ ‘작은 예수’ ‘우리 시대의 성자’ 등의 헌사가 있지만 저는 묘비에 적힌 한 마디 말이 선생의 삶을 선명하게 나타낸다고 봅니다. 주님 품에 안기기 두 달 전 아들에게 남긴 유언은 자신의 묘비에 ‘주님을 섬기다 간 사람’이라고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에서 받은 ‘모범일꾼상’을 비롯해 막사이사이상과 국민훈장 무궁화장, ‘제1회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 받은 상을 수없이 많았지만 오직 하늘의 상을 위해 모든 상을 물리고 싶었던 것이 선생의 마음이었습니다. 선생이 돌아가던 해, 제자들이 동상을 만들기 위해 찾아오자 “내 동상 만드는 놈은 벼락 맞아 죽어라”며 내쫓았다는 아름답고도 흔쾌한 일화도 있습니다.
주님을 섬기듯 이웃을 섬긴 선생의 삶은 한평생 이어졌습니다. 전쟁 후 가난한 사람을 돌보기 위해 시작한 무의촌 진료, 행려병자에게 베푼 사랑, 우리나라 최초 의료보험인 ‘청십자의료보험’의 태동, 뇌전증 장애인의 친구가 되어준 장미회 활동, 무료병원으로 시작한 복음병원 창설, 평양연합기독병원과 부산복음병원 원장, 김일성대학과 서울대 부산대 가톨릭대 의과대학 교수…. 막중한 직임을 맡고도 가난한 자에 대한 선생의 관심은 멈춘 적이 없었습니다.
마음을 다해 주님을 섬긴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많은 이에게 주님의 사랑으로 전해지는지를 장기려 선생을 통해 확인합니다. 선생처럼 다만 주님을 섬기다 간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이것이 가장 복된 삶임을 기억하는 우리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