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같은 양반과 천민의 구분은 없어졌지만 사회적 인식이나 경제 수준 때문에 현대사회가 점점 더 계급화, 계층화되고 있는 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금수저’ ‘흙수저’ 같은 말은 그저 수사가 아니라 사고방식의 내재화를 보여준다. ‘난 흙수저니까’라는 계급의식을 가지면 그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지난 14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영화 ‘전, 란’의 김상만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이런 현실에 만족하고 살 것인지,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선 여러 방법론이 있겠지만 시스템이 가진 결함에 전반적인 재점검이 필요하다는 내 생각이 영화의 내용과 맞아떨어졌다”며 “영화가 하나의 지향점을 보여준다기보다 관객들에게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 질문을 던졌으면 한다”고 영화를 연출한 의도를 밝혔다.
이달 초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처음 관객들을 만난 ‘전, 란’은 넷플릭스에서 지난 11일 공개됐다. 영화는 글로벌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시청 순위 집계 사이트 플릭스패트롤에서 영화 부문 전 세계 순위에서 상위권을 유지하며 호평받고 있다.
조선 중기 선조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무신 집안의 아들 종려(박정민)와 몸종 천영(강동원)이 왜란 발발 이후 무관과 의병으로 만나 맞서는 이야기다. 두 인물은 오랜 우정을 가지고 있지만 각각이 가진 계급의식을 바탕으로 서로를 오해하고 판단하며 감정의 혼란을 겪는다.
김 감독은 인물들의 관계 설정에 대해 “기본적으로 계급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영화다. 본인의 계급의식 속에서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잘 그려낸 시나리오”라며 “‘계급성을 뛰어넘어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를 주제로 하는데 이야기 구조 안에서 갈등과 화합을 표현할 수 있는 매개는 우정이나 사랑일 것이라고 봤다”고 설명했다.
몽진할 때 중전이 탄 가마가 엎어지자 선조(차승원)가 “말을 타지 그랬어”라고 말하는 대목 등 영화의 많은 장면과 대사들은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김자령(진선규)은 백성을 이끌고 의병장 활동을 하다가 선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김덕룡 장군을 모티브로 했다.
김 감독은 “조선왕조실록에는 당시의 상황이 아주 세세하게 기록돼 있다. 투항한 왜군을 관군으로 편입시켜 의병을 제압하는 내용에는 ‘어처구니 없고 한심하다’는 기록관의 사견까지 달려있다”며 “군중은 다양하게 표현하려 했다. 궁궐이 불에 탈 때 누군가는 슬퍼하고 누군가는 춤을 추고 누군가는 약탈한다. 인간이 가진 여러 면모를 그렸다”고 말했다.
이 작품은 박찬욱 감독이 시나리오를 써 일찌감치 화제를 모았다. 김 감독은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2000)의 미술감독을 맡으며 박 감독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박 감독에 대해 “나한테는 스승같은 분이다. 늘 내게 많은 재량을 허락해 주셨고, 이번 영화를 만들 때도 응원해 주셨다”며 “예전부터 함께 작업하면서 결이 잘 맞았다. 이 영화가 가진 액션 요소를 내가 잘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해 이 시나리오를 주신 게 아닐까 한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김 감독은 ‘친절한 금자씨’,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등의 포스터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포스터는 영상 이미지를 하나의 장면으로 표현해야 해서 늘 고민스러운 작업”이라고 그는 털어놨다.
이날 김 감독은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쓸며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기생충’ 포스터에 얽힌 뒷이야기도 전했다. 그는 “인물들의 눈을 가린 설정은 우연의 산물이다. ‘기생충’ 역시 계급성을 가진 이야기라서 우려스러운 부분이 있었다”며 “하층 사람들에 대한 보편적인 시각을 왜곡할 수 있다는 생각에 ‘특정 가족의 이야기’라는 것을 강조하려고 눈을 가렸다. 위험한 시도였는데 결과가 좋았다”고 말했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