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박한 세상에 착하디 착했던 너” 4명 살리고 떠난 병일씨

입력 2024-10-18 03:25 수정 2024-10-18 13:37
[기억저장소]는 생의 마지막 순간, 다른 이에게 생명을 전하고 떠난 이들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누군가에게 너무나 소중했을 그들의 삶을, 가족과 친구·지인들의 기억을 통해 기록하고 꼭꼭 담아 오래 보관하고자 합니다.

박병일씨가 생전에 육군 항공대 부사관으로 복무하던 시절 헬기 앞에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유가족 제공

“갑자기 전화가 와서는 병일이 헬기가 추락했다고 했어요. 그 뒤로는 정신이 나가서 뭘 어떻게 처리했는지 기억도 안 납니다.” 목숨 같았던 아들의 사고 날을 아버지 박인식(69)씨는 이렇게 기억했다.

민간 항공 화물 운송 업체 소속 5년차 헬기 정비사 박병일(사망 당시 35세)씨가 탄 헬기는 2022년 5월 26일 경남 거제시 선자산 정상 인근에 추락했다. 평소처럼 숲길 조성용 자재를 운반하던 중 사고가 벌어졌다. 팀원 김진호(52)씨는 동료들이 탄 헬기가 추락하는 모습을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부서진 헬기 후미에 반쯤 누워있던 병일씨는 고요하게 눈을 감은 채로 코를 골고 있었다. 진호씨는 “처음엔 병일이 코 고는 소리가 나길래 잠시 기절해서 잠든 줄 알았어요. 안은 너무 어둡고 내가 임의대로 만질 수도 없고. 계속 구조요청을 했는데 (올 때까지) 거의 1시간이 흘렀어요… 출혈이 엄청났을 텐데, 병일이가 입고 있던 오리털 파카가 (피를) 다 흡수했던 것 같아요”라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심한 두부 출혈에 의식이 없던 상태였던 병일씨는 결국 뇌사 판정을 받았다. 사고 나흘 만인 2022년 5월 19일 병일씨는 심장과 간, 신장을 기증해 4명의 삶을 살리고 세상을 떠났다.

병일씨는 1987년 11월 30일 충북 음성에서 1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인식씨는 한길로만 쭉 반듯하게 가라는 의미로 돌림자 병자에 한 일(一) 자를 붙여 아들 이름을 손수 지어줬다. 이름답게 병일씨는 어린 시절부터 손으로 만들고 고치는 것을 일관되게 좋아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인식씨가 큰맘 먹고 집에 들여놓은 컬러텔레비전을 몰래 해체하다 들키는 일도 있었다.

병일씨가 아버지와 헬기 안에서, 어머니와 함께한 여행에서 찍은 사진. 유가족 제공

중학생 무렵엔 고장 난 라디오와 공구로 방을 꽉 채웠던 병일씨는 스무 살 성인이 되면서부터 정비사의 꿈을 키웠다. 내내 객지 생활을 했지만 그래도 늘 곁에 있는 듯 살가운 아들이었다. 인식씨는 “7년 전 큰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지는 일 하러 나가 있으니, 늘 엄마가 마음에 걸린다고 챙겼다. 병일이가 제일 많이 하던 말이 ‘엄마 사랑해’였다”면서 “하나 남은 아들, 걔가 내 모든 것이었다”고 울먹였다.

그런 아들의 장기기증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인식씨는 주치의가 처음 아들의 장기기증을 권유했을 때도 “절대 안 된다”고 펄쩍 뛰었다. 그런데 십수 년 전 병일씨가 스치듯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TV에 나오는 장기기증 사연을 함께 보던 중 인식씨가 “어느 부모가 그걸(장기기증) 하겠냐”고 말하자 병일씨는 “장기기증하고 가는 게 좋아. 어차피 가는 건데 몇 사람 살리고 가면 좋은 거지”라고 답했다. 실제 병일씨가 남긴 소지품에선 헌혈증 40~50장이 나왔다. 골수 기증 서약도 해뒀다고 한다.

고민 끝에 장기기증을 결정했다. 세상 어딘가 아들의 흔적이 남길 바란 마음도 있었다. 인식씨는 “아들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걸 믿기 어려워서 뭐라도 남기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면서 “그래도 아들은 이걸 원하지 않았을까 싶다”고 했다. 인식씨는 아들이 떠난 지 2년이 넘은 지금도 매일 생각이 난다고 했다. 그는 “하루에도 열두 번은 생각난다. 2년간 매일 이러다 보니 이젠 좀 바보가 되는 것 같다. 사고 조사도 아직 안 끝났는데 자꾸 기억도 흐려진다”고 토로했다.

병일씨를 매일같이 떠올리는 건 그를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봤던 직장 선배이자 동료인 진호씨도 마찬가지다. 진호씨는 2017년 4월, 팀에 합류하러 경남 통영에 내려온 병일씨와의 첫 만남을 아직 잊지 못한다. 건장한 체격에, 뿔테 안경을 낀 순한 얼굴의 병일씨는 “담배 하냐. 술은 좋아하냐”는 물음에 “예, 담배 합니다. 술은 많이 못 먹어도 좋아합니다”라고 답했다. 진호씨는 “바로 합격이었다”라며 당시를 떠올렸다.

그리고 5년을 동고동락했다. 진호씨는 “병일이는 원체 천성이 착했다. 우리 회사, 일이 결코 환경이 좋지 않은데도 잘 적응했다. 불편하고 힘든 게 있어도 잘 웃고, 지가 잘 맞추려 했다. 그러니까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랬기에 병일씨의 목숨을 앗아간 그 날 사고가 더욱 애달프다. 병일씨는 그날 기장 부탁에 업무를 돕고자 헬기에 탑승했다가 변을 당했다고 진호씨는 설명했다. 헬기 정비사가 헬기 운행에 동승할 의무는 없지만 통상적으로 이뤄지던 일이었다. 그는 “기장님이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면 헬기에 같이 타거나 지상에서 유도해 주는 식으로 도와준다”며 “저희는 항상 병일이가 직접 탔다. 일을 안전하게 하려고 (헬기에) 탑승해서 봐준 건데, 그저 도와주려고…”라며 뒷말을 삼켰다.

병일씨를 기억하는 이들은 서로 다른 시간, 장소에서 그와의 인연을 가졌지만, 입을 모아 그를 ‘착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고등학교 동창 양태운(38)씨는 “병일이가 정비 일은 특수직이라 금액적으로도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며 “부모님께 용돈을 많이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 정비 일을 선택할 거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병일이가 고등학생 때도 부모님 호강시켜 드리고 싶다고 했었다”며 “다른 친구들보다도 부모님을 많이 생각하고 철이 든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고 덧붙였다.

양씨는 “(병일이가) 유독 웃음이 많았는데 지금도 가끔 그 높은 웃음소리가 떠오른다”며 “사람들은 ‘착하면 바보’라고들 하는데, 지금 같은 세상이 병일이 같은 착한 사람이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고 힘주어 말했다.

진호씨는 “병일이가 꿈에 나온 날이면 잠 깨고 나서 ‘로또 번호라도 알려주지’라고 한다”고 웃어 보이면서도 혼자 밥을 먹다가도 그가 떠올라 앞에 술잔 하나 따라놓곤 한다고 말했다. 그의 일부가 세상 어느 곳에 있다는 게 때론 위안이 된다고도 했다. 진호씨는 “장기기증은 병일이다운 선택이었다. 어딘가에 병일이 일부분이 같이 살아간다고 생각을 하려 한다”고 말했다.

아버지 인식씨도 “기증을 결정할 때 정말 떠나보낸다는 게 너무 겁이 났다. 그런데 (장기기증을 하고) 우리 아들이 어딘가에는 살아 있고 일부만 갔다는 생각을 하니 무지하게 위안이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비록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우리 아들 심장으로 건강하게 살고 있으면 그걸로 만족한다”고 담담히 전했다.

성윤수 기자 tigri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