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진료실 밖 의사·환자 만남… 서로 응원하는 작은 운동의 시작되길

입력 2024-10-15 04:15

#청년1. 폭력적인 아버지를 견디다 못한 소년은 다니던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무작정 상경했다. 경기 북부 자그마한 도시에 자취방을 구했다. 소년의 은둔생활이 시작됐다. 열아홉 청년이 돼 처음 정신과를 찾았을 땐 장발에, 몸에선 악취가 났다. 감옥 같은 고립된 생활의 흔적이 흠뻑 배어 있었다. 의사는 청년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처음 만난 어른이 됐다. 그 후, 1년이 지나 청년은 항상 입던 후드티를 빨고 처음으로 이발을 했으며 동네를 산책하기 시작했다.

#청년2. 겁이 많고 낯가림이 심했던 소녀는 학창시절 친구들로부터 왕따의 대상이 됐다. 나름의 성실함으로 대학을 졸업했지만 잦은 공황 발작과 행동 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졸업 후 몇 번의 면접 끝에 합격한 직장에서 처음 받은 일은 회사 생산 식품의 매장 관리직이었다. 부모 나이뻘 되는 매점 점주들을 상대로 지시하고 조언하는 일이었다. 엄두가 나지 않고 힘들어 진료 때마다 울면서 그만두겠다고 하길 반복했지만, 어느덧 10개월째 일을 하고 있다. 두려워서 피하고 숨기만 하던 소녀는 힘들지만 작은 도전을 즐기고 성취하는 청년으로 성장하는 중이다.

진료실에서 만나는 젊은 친구들의 눈물 나는 사회 적응기는 어떤 드라마보다도 감동적이다. 이들의 고통과 아픔이 정당한 것이라고 인정해주는 것, 그들이 틀렸거나 유약한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아주 작은 성취에 세상 누구보다도 함께 기뻐하고 환호해 주는 것, 이들이 드라마의 주연으로서 세상으로 나아가도록 꾹 참고 기다려주는 것이 조연으로서 의사의 역할이다.

하지만 정신건강의학과조차도 3분 진료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나라의 의료 현실에서 이런 감동의 드라마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약만 주지, 하는 게 뭐 있냐?”는 비난, 거꾸로 “약만 받으면 되는데, 왜 2시간을 기다리게 하느냐?”는 고성, “정신과에서 무슨 검사가 이렇게 비싸냐?”는 불만 등 진료실 밖은 수시로 고함과 소란으로 혼돈이다. 빅5 병원이 주도하는 규모의 경쟁, 가치가 아닌 행위에 지불하는 제도, 고가 검사와 빠른 시간 최다수를 진료해야 하는 진료 수익 창출 구조, 의술이 아닌 브랜드를 쇼핑하는 의료소비 행태 등은 의사 환자 관계를 잠재적 파탄 상태로 내몰아 왔다.

장기화되고 있는 의·정 갈등 사태 이면에는 잘못된 의료 제도와 이로 인한 불신이 존재하고 있다. 진료실 안에서 의사들은 나름의 사명감으로 헌신하지만, 진료 과정에서 누적된 환자들의 침묵과 불신은 진료실 밖에서 의사 집단에 대한 피상적 비난으로 이어져 왔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에서 환자는 별도의 권리를 가진 주체가 아닌, 의사가 치료해주고 이익을 보장해줘야 하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현 시대의 의사와 환자는 건강이라는 공동의 가치와 목표를 위해 협력하고 소통하는 동반자적 관계여야 한다. 의사와 환자 관계의 시작은 진료실이지만, 진료실 안의 소통만으로는 바람직한 의사 환자 관계가 보장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의료 공급자인 국가 건강보험제도의 개선을 위해 의사와 환자가 함께 고민하고 지혜를 모아야 한다. 이를 위해선 상호 간의 유대감이 필요하다. 유대감은 진료실 내 엄격함보다는 진료실 밖에서의 친밀감과 대등함으로 형성된다. 건강한 환우 집단과 의사 집단의 교류, 공동선을 추구할 수 있는 소통의 기회를 마련함으로써 상호 간 연대와 옹호가 실현될 수 있다.

신경정신의학회는 2024정신건강의 날 행사로, 의사와 회복된 환자들이 진료실 밖에서 만나 서로의 이야기를 공감하고 힐링하는 자리인 ‘마음건강 톡톡(talk talk) 페스티벌, 내 친구를 소개합니다’를 마련한다. 오는 27일 오후 4시, 정동1928아트센터에서 열린다. 필자도 앞서와 같은 멋진 친구들을 진료실 밖에서 만날 생각에 마음이 설렌다. 일회성 이벤트가 아닌, 진료실 안의 신뢰를 바탕으로 진료실 밖에서 의사와 환자들이 서로를 응원하는 작은 운동의 시작이 되길 소망해 본다.

이해국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대외협력홍보 특별위원장·가톨릭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