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문화] “인생은 사이다보단 고구마… 약자들에 작은 위로라도 됐길”

입력 2024-10-14 04:01
최근 종영한 ‘백설공주에게 죽음을-블랙아웃’의 고정우는 연기와 일상의 ‘온앤오프’를 잘하는 변요한조차 자꾸만 마음이 쓰여 돌아보게 만드는 캐릭터였다. 변요한은 “허구의 인물인데도 정우가 걱정된다”며 “고정우가 잘 살길 바란다”고 말했다. 팀호프 제공

내가 죽이지 않았다고, 죽인 기억이 없다고 수백번 외치지만 들어주는 이는 없다. 사람을 죽여놓고도 아니라고 잡아떼는 파렴치한이란 손가락질과 외면, 혐오만 돌아올 뿐이다. 믿었던 사람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하는 정우는 점차 말수가 줄고 무기력해진다.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신뢰를 나누는 게 정우에겐 목숨을 걸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넬레 노이하우스의 책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을 각색해 제작한 드라마 ‘백설공주에게 죽음을-블랙아웃’(백설공주에게)은 살인자 누명을 쓴 고정우(변요한)가 10년의 징역을 복역하고 나와 기억나지 않는 그날의 진실을 역으로 추적하는 미스터리 스릴러다. 변영주 감독의 첫 드라마로 공개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촬영을 마치고 드라마가 편성되기까지 2년이 걸렸다.

지난 8일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변요한은 “(드라마 편성이 늦어졌지만) 걱정보단 기대가 앞섰다. 모든 배우와 스태프가 작품을 대충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 있었다. 언제, 어떤 시기에 작품이 나오게 될지만 궁금했다”며 “작품을 해치지 않기 위해 아무런 홍보도 하지 않았다. 그냥 작품을 던져놓고 기다려보고 싶었다. 진심은 통할 거라 생각했는데, 시청자들이 작품을 알아봐 주셔서 너무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백설공주에게’는 2.8%의 시청률로 출발했지만, ‘웰메이드’란 입소문을 타고 8.8%의 최고 시청률로 막을 내렸다.

그가 작품에 이런 자신감을 보인 건 함께 일한 동료들의 열정을 봤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감의 이유를) 일일이 말하면 밤샐 것”이라며 “변 감독님과 스태프들의 투혼, 그리고 함께 연기한 배우들, 뿌리를 잘 잡아주신 선배들이 그 이유다. 매 장면에 들어갈 때 뜨거움과 긴장감, 진정성을 느꼈다. 삼박자가 잘 맞았던 작품”이라고 강조했다.

드라마 '백설공주에게 죽음을-블랙아웃' 스틸사진. MBC 제공

‘백설공주에게’는 흔한 ‘사이다’ 권선징악 스토리가 아니다. 진실을 알고도 내 자식을, 내 명예를 지키기 위해 무천시 마을 사람 모두가 한통속이 되어 정우를 살인자로 몰아가기 위해 만든 공고한 거짓의 벽을 정우 홀로 깨야 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진행되며 그의 곁엔 그를 돕는 경찰 상철(고준)과 휴학한 의대생 설(김보라)이 생기지만, 이들이 정우를 믿게 되기까지 정우는 또 수많은 편견의 벽을 넘어서야 했다. 이 지난한 과정이 엔딩 직전까지 이어져 ‘고구마’ 소리가 절로 나오지만, 시청자들은 탄탄한 이야기와 몰입감을 높이는 배우들의 연기에 시청을 포기하지 않았다.

변요한은 많은 공을 변 감독과 극본을 쓴 서주연 작가에게 돌렸다. 그는 “(연기의) 첫 단추가 중요했다. 원작 소설을 읽은 분들은 결말을 알지만, 보지 않은 분들도 있기에 그 수위를 맞춰줘야 했고, 장르 특성상 (정우가) 범인일까 아닐까 하는 궁금증을 가져가야 했다. 이런 것들은 결국 변 감독님의 방향을 따라갔다”며 “작가님 역시 베스트셀러를 드라마로 각색하면서 만만치 않은 에너지로 작품을 컨트롤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자신감들이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완주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드라마 '백설공주에게 죽음을-블랙아웃' 스틸사진. MBC 제공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인생이 어떻게 다 사이다입니까. 삶을 살아가는 게 다 고구마 아닌가요? 인생은 금요일까지 열심히 달리다가 시원한 맥주 한 잔 마셨을 때 한주의 피로가 다 날아가곤 하는 날의 연속인 것 같아요. 저희 드라마는 그런 걸 최대한 생생하게 담으려고 노력했어요. 드라마 속의 사건은 크지만 본질적으로는 대단하지 않은 것 같아요. 모두가 겪는 이야기여서 시청자도 더 화내고 응원해주신 게 아닐까요.”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일방적으로 당하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까지 당한 정우를 연기하는 게 변요한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모든 연기가 도전이었다고 말하는 그지만, 정우만큼은 다른 작품들과 달랐다. 일과 삶의 온앤오프가 명확한 편임에도 정우를 연기하면서는 그게 쉽지 않았고, 작품에 다양한 의견을 내는 편이지만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드라마 '백설공주에게 죽음을-블랙아웃' 스틸사진. MBC 제공

변요한은 “고정우는 힘이 없는 인물이라서 목소리를 내도 다 무시당한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주고받는 게 있어야 하는데 정우에겐 말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래서 점점 힘을 잃어가고 9화 이후부터 정우는 말이 없어진다”며 “내가 정우라도 그럴 것 같아서 감독님에게도 어떤 의견을 내지 않았다. 주인공이 사이다와 통쾌함을 주고, 상황을 조율해나가는 캐릭터가 아니라 벽에 대고 얘기하는 캐릭터 같았다. 그래서 외롭고 까다로웠다”고 설명했다.

점점 무채색으로 변해가며 잿빛 인생을 사는 캐릭터를 연기해보고 싶었다던 그는 정우가 느끼는 답답함, 무기력함을 표현하기 위해 함께 고독해졌다. 변요한은 “시나리오와 캐릭터를 탓하지 않고 오롯이 받아들였다. 답답함을 표출하고 싶지도 않았다”며 “원래 일이 끝나면 집에 가서 잘 운동하고 밥 먹고 자는 편이다. 근데 정우는 제가 멀리서 보고, 지켜줘야 하는 캐릭터였다. 그래서 이 작품은 되게 여운이 남고, 허구의 인물인데도 정우가 걱정된다”고 말했다. 이렇게 말하는 와중에도 그의 얼굴엔 복잡한 감정이 스쳐 갔다.

드라마 '백설공주에게 죽음을-블랙아웃' 스틸사진. MBC 제공

쉽지 않은 캐릭터였지만 그럼에도 ‘백설공주에게’를 선택했던 건 힘없는 약자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대본을 받았을 때 우연히 범죄를 다룬 다큐를 보고 있었다. 그걸 보는데 (피해자에게) 공감만 할 뿐 내가 해줄 수 있는 것도 없고, TV를 끄는 순간 외면하는 것 같았다”며 “그래서 이 대본을 다시 봤다. 저의 사명감이지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고 싶었다. 작은 불씨, 그게 아니라도 작은 무언가라도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고 회상했다.

드라마에서 상철은 재심 끝에 무죄를 받은 정우에게 이렇게 말한다. “정우야 그냥 보통의 삶을 살면 돼. 보통으로 힘들어하고 보통으로 신나고 보통으로 웃고 울고. 그냥 보통의 마음으로 버티고 살아. 살면서 손해 본다는 생각하지 말고, 이사 가게 되면 새로운 이웃에게 겁먹지 말고. 낯선 사람에게 경계부터 하지 말고. 그냥 그렇게, 지금처럼 살면 돼.” 변요한은 이 대사를 가장 좋아한다며 “저희는 가장 리얼리티에 가까운 순간을 거짓말하지 않고 마주 보려 했고, 그걸 느끼려 했다. 그래서 시청자분들이 ‘꿀고구마’라고 알아봐 주신 게 아닐까”라고 말했다.

드라마 '백설공주에게 죽음을-블랙아웃' 스틸사진. MBC 제공

올해는 변요한에게 특별한 해다. 1년에 한 편 정도의 작품을 해왔지만, 올해는 3편의 작품이 대중을 만났기 때문이다. 영화 ‘그녀가 죽었다’와 드라마 ‘삼식이삼촌’, ‘백설공주에게’가 모두 올해 공개됐다. 그는 “올해는 정말 특별하고 감사한 해다. 작품이 세상에 나오는 게 귀한 일이란 걸 점점 느끼게 된다”며 “모든 사람이 기대하고 생각했던 것처럼 엄청난 대박은 아니지만 내가 노력한 것만큼 정확한 수치의 성공을 했다고 생각한다. 올해 주어진 수확이 있었으니 다음 작품에서도 수확이 적더라도 과정을 잘 만들고 싶다”고 바람을 드러냈다.

정진영 기자 yo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