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옥의 컬처 아이] 게티 PST 아트에서 배운 기업의 예술후원

입력 2024-10-10 00:32

“당신이 돈을 셀 수 있으면 진정한 부자가 아니다”고 했던 진 폴 게티는 미국의 석유 재벌이다. 억만장자지만 구두쇠 기질 때문에 사치를 부리지 않았다. 손자 납치 사건 때도 몸값을 깎았던 일화는 유명하다. 그가 돈을 아끼지 않고 쓴 유일한 분야가 예술이다. 게티재단을 세우고 수집한 미술품을 로스앤젤레스(LA)에 설립한 게티뮤지엄에서 무료로 보여주고 있다.

그 게티재단이 칼을 빼들었다. 5년 단위로 주최하는 초대형 미술 행사인 ‘PST 아트-예술과 문화의 충돌’이 그것이다. 전 세계 유수의 언론을 초대한 이 행사를 취재하러 지난달 LA에 다녀왔다. 행사는 지난달 15일 개막해 5개월에 걸쳐 ‘예술과 과학의 충돌’을 주제로 게티뮤지엄, LA카운티미술관(라크마), 해머 등 70여개 기관에서 열린다. 2011년, 2017년 ‘퍼시픽 스탠더드 타임(태평양표준시)’이라는 이름으로 열렸던 걸 이번 행사부터 ‘PST 아트’로 바꾸고 정례화했다.

이런 개념의 미술 행사는 지금까지 없었다. 베니스비엔날레든 카셀도큐멘타든 기존의 현대미술 제전은 행사 장소가 특정 도시에 한정된다. PST 아트는 도시 경계를 넘어 LA카운티, 샌디에이고카운티, 오렌지카운티 등 미국 남서부 전역을 미술로 물들인다.

이런 초광대역 행보가 가능한 것은 2000만 달러(약 270억원) 이상의 보조금을 통해 행사를 주도하는 게티재단의 취지에 공감해 뱅크오브아메리카, 유전자 검사 솔루션 제공업체인 풀젠트 제네틱스 공동창업자 에바 셰와 밍 셰 등 기업 후원자들이 동참해준 덕분이다.

7박9일의 프레스 프리뷰 동안 하루 대여섯 개 전시를 보는 강행군을 하면서도 내심 부러웠던 것은 미국의 예술 후원 시스템이다. 우선 전시 준비기간이 충분히 길다는 점이다. PST 아트에 참여한 샌디에이고 밍예미술관은 ‘인디고 블루’를 주제로 이집트·페루·중국·일본·한국 등 세계 염색 문화를 조명했다. 관계자는 “2019년 게티재단 공모에 당선돼 4년 이상 준비했다. 덕분에 32개국에서 180개 작품을 빌려오는 성과를 낼 수 있었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지방자치단체장의 치적용처럼 2년 단위 비엔날레만 전국 단위로 열린다. 비슷한 주제가 전국에서 되풀이되며 국가적 에너지 총량이 낭비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두 번째로 학문의 벽을 허물고 다른 분야끼리 머리를 맞댄 학제 간 연구기반 전시라는 점이다. 전시 주제가 ‘예술과 과학의 충돌’이기도 했지만 현대미술과 무관한 과학계가 전시에 참여했다. 덕분에 미 항공우주국(나사) 연구 성과가 반영된 화성에서 부는 바람에 반응해 7~8분 시차를 두고 흔들리는 갈대 작품도 만날 수 있었다. 이를 비롯해 전시 주제는 바이오 기술부터 지속 가능한 농업, 고대 우주론, 원주민 공상과학, 인공지능(AI), 환경 정의 등을 아우른다.

게티재단 최고경영자 캐서린 E 플레밍은 “5년 주기로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다학제적 협업”을 강조했다. AI시대의 창의성을 위한 대안인 학제 간 융합을 선도적으로 미술에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엄청난 물량 공세에도 불구하고 기업 이미지 드러내기용 행사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마케팅에는 관심 없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PST 아트’를 크게 내세우지 않았다. 게티뮤지엄 PST 아트 기획전 ‘루멘: 빛과 예술의 과학’을 본 한 지인이 PST 아트인 줄 전혀 모르고 관람 소감을 페이스북에 올릴 정도였다. “관람객이 덜 와도 연구는 남는다”는 배포가 느껴졌다. 전시 성공을 입장객 수로만 재는 한국적 시스템에서는 여러 가지로 부러운 ‘통 큰’ 이벤트였다.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