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중반이 되니까 은퇴에 대해 종종 생각하게 된다. 친구들과의 대화가 그쪽으로 향하는 경우도 잦다. 앞서 퇴직한 선배들을 만나면 요즘 뭐 하고 지내는지 질문도 많아진다. 대부분 그럭저럭 지낸다고, 은퇴 후에 뭐 특별한 게 있겠느냐는 듯이 얘기한다. 은퇴 후의 삶에 대한 모델이나 힌트라고 할 만한 걸 발견하긴 어렵다.
은퇴 후의 삶이란 퇴직 후의 생계나 일과는 다른 것이다. 경제활동이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갑자기 주어진 많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되는지, 나이 든 어른으로서 세상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직장과 조직에서 쓸모를 다한 후 여생의 보람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같은 질문들에 답을 찾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운사모’가 반가웠다. ‘운동을 사랑하는 모임’이라는 소박한 이름의 이 단체는 회원들이 한 달에 1만원씩 모아 형편이 어려운 스포츠 유망주를 지원하는 일을 15년간 해 왔다. 현재 회원은 370명 정도다. 지난여름 2024 파리올림픽에서 활약한 펜싱 선수 오상욱과 높이뛰기 선수 우상혁이 중·고교 시절 운사모의 지원금을 받았고 그것이 큰 힘이 됐다고 밝히면서 이 모임이 알려졌다. 금메달 세 개를 따고 스포츠 스타가 된 오상욱은 어리고 어렵던 시절 받은 운사모의 장학금을 ‘진짜 배고플 때 먹는 초코파이’에 비유하면서 “운사모 덕분에 배고프지 않게 훈련을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운사모는 월 1만원 기부로 얼마나 멋진 일을 해낼 수 있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훌륭한 기부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TV 예능 프로그램 ‘유퀴즈’에 출연한 이건표 운사모 회장은 돈을 좀 더 내겠다는 회원들도 있는데 모두 똑같이 1만원씩 내는 원칙을 지키고 있다고 말했다. 일회성의 거액 기부가 주목받지만 작고 꾸준히 기부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이야말로 기부 문화로 축적될 것이다. 주변을 보면 나이를 꽤 먹었어도 기부 한 번 안 해본 사람이 적지 않다. 한국인들은 세계적으로 남부럽지 않게 잘사는 국민들에 속하지만 기부에 인색하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운사모처럼 월 1만원으로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면 기부에 참여할 사람은 무척 많을 것이다. 좋은 기부 모델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
운사모가 비인기 종목의 지방 중·고교 선수들을 지원해 온 점은 남다르게 보인다. 펜싱이나 높이뛰기, 카누 같은 종목은 탁월한 스타가 없는 한 주목받기 어렵다. 게다가 지방에서 운동하는 어린 선수들에게 누가 관심을 줄까. 세상 어디에나 그런 분야가 있다. 그런 방치된 곳을 돌보는 시민들이 있다는 건 참 든든한 일이다. 무엇보다 운사모가 나이 든 어른들 모임이라는 점은 인상적이다. 70대인 이 회장은 대전시교육청에서 소년체전 담당 장학사를 하다가 은퇴했다. 비인기 종목의 어린 선수들이 형편이 어려워 운동을 그만두는 걸 안타까워하다가 주변 사람들을 모아 운사모를 시작했다고 한다. 운사모는 은퇴한 어른들의 모임이고, 대전지역 어른들의 모임이다.
운사모는 기부 모델이자 어른들의 삶의 모델, 사회를 바꾸는 모델이 될 수 있다. 한국에서는 베이비부머 세대의 은퇴가 본격화되면서 은퇴자들이 거대한 규모로 형성되고 있다. 이들은 시간이 있고, 경제적 여유도 있다. 동창 모임이나 고향 모임, 직장 모임, 동호인 모임 등 각종 모임도 활발하다. 시장도, 정치도 이들에게 주목하고 있다. 이 거대한 은퇴자 인구가 우리 사회 곳곳의 빈 틈을 메우고 어린 세대를 지원하는 일에 관심을 보여준다면 큰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당장 모임의 회비 중 일부만이라도 떼어서 ‘어른의 일’을 시작할 수 있다.
김남중 국제부 선임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