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두 나무의 싸움 ‘자유냐 노예냐’

입력 2024-10-10 03:08

에덴동산 중앙에는 인류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두 나무, 곧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이 두 나무는 지금까지도 인간의 삶 중앙에 위치하며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생명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가는 참된 기독교의 모형입니다. 생명나무이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을 때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흘러갑니다.

반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지식나무’입니다. 선과 악을 구별할 줄 아는 지식을 포함해 그 양자를 모두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됨을 뜻합니다. 선악과를 따먹기 전, 아담은 악을 알지도 못하고 행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음으로 죄에 대한 지식과 죄에 대해 눈이 밝아졌습니다.(창 3:7, 롬 4:15) 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서로 다른 두 영적인 가계도를 상징합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이 두 나무의 역사를 나타내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5장은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하는 죽음의 족보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 먹은 아담의 가계도를 보여줍니다.(창 5:1~32) 그런데 마태복음 1장은 생명을 ‘낳고, 낳고, 낳으니라’하는 생명의 족보로 생명나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보여줍니다.(마 1:1~16) 그러므로 순종할수록 한쪽은 노예화로 가고, 다른 한쪽은 자유화로 가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원수 마귀는 오늘날에도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영혼들을 미혹합니다.(창 3:6) 사람들은 도덕을 실천하고, 종교적 수양을 쌓는 등 제 나름대로 선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이런 선 역시 결과적으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선한 사람도 생명나무이신 예수님 안에 있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 결과는 항상 ‘죽었더라’의 죽음의 족보를 기록해 나갈 뿐입니다.(16~18절) 믿는 자들에게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선은 악만큼 나쁜 위력을 발휘하는데, 이는 대체물이며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밀어내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 원수의 최종 목표입니다. 탕자의 형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조종당했습니다. 회개해 아버지의 사랑 안으로 돌아온 동생을 조롱하며 그를 받아준 아버지께 화를 냈습니다.(눅 15:25~32) 이 종교적인 형은 24시간 아버지 집에서 살면서 아버지를 위해서 살았지만, 아버지와의 친밀함을 잃어버렸습니다. 탕자에게 은혜를 베푼 아버지가 불공평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영성은 우리를 자기중심적으로 만듭니다. 교회 와서 은혜를 받긴 받는데 은혜를 자기중심적으로 받기 때문에 종교적인 사람으로 살아갑니다.(고후 6:1)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도둑질해 가는 것이 뱀의 역사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역사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역사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치길 바랍니다. 진리와 거짓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두 종자를 섞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신 22:2) 섞이면 원수에게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2절 속 치유와 생명, 자유의 선포가 여러분의 삶을 덮어주시길 소망합니다. 여러분 마음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으로 가득 채워지길 축복합니다.

강희준 서울 주승리교회 목사

◇서울 구로구 고척동에 있는 주승리교회는 시편 24편의 부르심에 따라 사랑의 이중 계명,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실천을 목표로 삼은 교회입니다. 나라와 민족, 북한, 한국교회와 다음세대를 위해서 힘써 중보하는 교회입니다. 종교적이고 화석화된 신앙생활을 버리고 주님과의 친밀함과 기름 부음을 추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