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킹’으로 불리는 박병근 작가… 암 투병 후 신앙의 붓 들어

입력 2024-10-09 03:03
박병근 작가가 7일 자신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종로구 새문안아트갤러리에서 암 투병 뒤 붓을 들게 된 계기를 설명하고 있다. 신석현 포토그래퍼

명함만 내놔도 남부러워할 대기업에 취업한 청년은 이름만 들어도 대중이 놀랄 만한 제품을 디자인하고 홍보하며 청춘의 커리어를 채웠다. 경력을 살려 사업체를 운영하며 인생의 상승 곡선을 지나고 있을 때 찾아온 암 선고는 그를 한순간에 주저앉혔다. 하지만 절망 가운데 하나님이 예비해두신 빛을 발견한 그는 ‘빛이 있으라’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캔버스에 수놓고 있었다. 추상화에 반도체와 홀로그램을 결합하며 독보적인 화풍을 선보이는 박병근(69) 작가 이야기다.

최근 서울 인왕산 아랫자락에 자리 잡은 그의 작업실 한편에 들어서자 곳곳에 그의 손때 묻은 습작이 그려진 노트가 눈에 띄었다. 책장마다 날짜가 적힌 노트엔 습작에 영감을 준 성경 구절, 그날 들은 설교의 핵심 내용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는 “예술의 시작은 기도”라고 했다.

박 작가의 작품엔 특별한 오브제가 등장한다. 반도체와 홀로그램이다. 이 두 가지는 그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소재이자 작가로 살아온 11년 동안 그의 작품에 독특한 숨결을 불어넣어 준 원동력이다.

다른 이들을 놀라게 하는 그만의 창의력은 청년 시절부터 빛났다. 삼성전자에서 근무할 땐 국민 휴대폰으로 명성을 날렸던 ‘애니콜’의 콘셉트 디자인을 맡았고, 홍보 분야로 몸을 옮긴 뒤엔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에서 굵직한 프로젝트에 이름을 올렸다. 커리어를 바탕으로 디스플레이 관련 기업 운영에 나서며 승승장구하던 그의 삶에 제동이 걸린 건 위암 선고 직후였다.

“열 살 때 동생따라 교회 부흥회 간 뒤로 교회에 몸은 담갔지만 신앙은 성숙하질 못했어요. 암 투병 환자로 삶이 뒤바뀌면서 하나님의 목소리가 분명해지더군요. 세상 것을 멈추라는 것이었습니다. 매일 술자리에 발이 묶여 응급실에까지 가던 홍보부장 시절, 돈과 욕망 덩어리처럼 살던 사업가 시절을 회개했지요. 그러면서 어릴 적 꿈이었던 화가가 떠올랐어요.”

전자회사에서 제품디자이너로 일하던 당시 익숙하게 마주했던 반도체와 홀로그램은 화가로 새출발에 선 그에게 전에 없던 작품 세계를 선사했다. 그 어떤 질감과 직간접 조명, 심지어 인공지능(AI)으로도 흉내낼 수 없는 빛을 캔버스에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실제로 그의 화법은 ‘조명 수단과 입체감 표출 화법’으로 특허 등록이 돼 있다.

오는 29일까지 새문안아트갤러리에서 이어지는 그의 열한 번째 개인전엔 사물의 깊이감을 더하는 홀로그램의 반짝임, 현재는 단종된 256비트(bit) 반도체 위에 색감을 더하고 레진을 입힌 번뜩이는 표현기법이 공간을 가득 채운다.

박 작가는 대표작 ‘빛의 채널’ 앞에서 “아무리 세상이 어둠에 갇히게 되더라도 사람들의 어려움을 거뜬히 녹여내고도 남을 예수님의 온기와 빛이 크리스천들을 통해 전달되길 바라는 소망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힐튼호텔 쉐라톤호텔 남송미술관 아토믹스(뉴욕) 등 국내외 유명 공간은 물론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등 유명 인사들에게 소장되고 있는 박 작가의 작품엔 필명으로 쓰는 그의 영문 이름 ‘parking(파킹)’이 쓰여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을 오롯이 적은 것입니다. 작품이 있는 곳, 빛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주차해두고 머물고 싶은 행복한 마음. 앞으로도 그 마음으로 붓을 들 겁니다(웃음).”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