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도호(62)는 ‘달팽이’다. 서울 토박이로 서울대 동양화과 학·석사를 졸업하고 미국 예일대 조소과 석사를 졸업한 뒤 뉴욕에서 활동했다. 시드니현대미술관,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 워싱턴 D.C. 스미소니언미술관, 도쿄 모리미술관 등 전 세계 주요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했다. 현재는 런던에 근거지를 두고 그야말로 노매드로 사는 그는 달팽이처럼 ‘집’을 짊어지고 산다.
처음 그 집은 성북동 한옥이었다. 한옥은 뉴욕의 아파트 사이에 처박혀 있는 모습(2010년 리버풀 비엔날레 ‘다리를 놓는 집’)으로 구현됐고, 미국의 18륜 트럭 위에 실린 모형(2012년 리움미술관, ‘비밀의 정원’)으로 재현됐다. 현대미술을 낯설어하는 대중에게도 서도호의 이름을 각인시킨 2012년 리움미술관 전시에서는 트레이드마크가 된 천으로 만든 집으로 구현됐다. 뉴욕에서 살았던 아파트 역시 천으로 지어졌다.
그가 리움미술관 전시 이후 12년 만에 한국에서 개인전을 하며 대중의 사랑을 새삼 확인하고 있다. 2001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대표로 선정되며 국제무대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직후인 2003년 한국 첫 개인전을 연 서울 종로구 율곡로 아트선재센터에서다. 관계자는 8일 “지난 8월 16일 개막한 전시는 연일 관람객들로 붐빈다. 아트선재 사상 최다 관객”이라고 전했다.
그런데 1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서도호 열풍을 일으켰던 리움 전시에서의 스펙터클함이 이번 전시에는 없다. 그때 관객을 사로잡았던 천으로 만든 집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이번 전시가 전반적으로 회고전 성격을 갖고 있음에도 말이다. 작가는 ‘추정’ ‘사변’을 뜻하는 영어 ‘스페큘레이션(speculation)’을 전시 제목으로 붙여 그 이유를 설명한다.
“내가 탐구하는 개념들이 많은 경우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을 오래전에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사변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림을 그리고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모형과 도면, 영상 등을 제작한다. ”
전시를 본 소감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달팽이처럼 짊어진 집의 무게로부터 점점 자유로워지는 심리적 변화가 읽힌다는 점이다. 서도호의 작품에 등장하는 한옥은 수묵의 현대화를 이끈 부친 서세옥(1929∼2020)이 소나무 우거진 자리에 지은 무송재(撫松齋)다. 경복궁 향원정을 수리한 대목장을 수소문해 지은 그 집에서 작가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자랐다. 한옥은 아버지이자, 한국이며, 동양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한국에서 뉴욕으로 날아와 처박혔다는 사실은 한옥이 갖는 무게와 권위를 시사하며, 동시에 그걸 벗어나고자 했던 작가의 내면을 충격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그런 한옥은 바퀴 달린 차에 실어 나르거나, 얇은 천으로 지어져 접어서 휴대할 수 있는 것이 됐다. ‘노매드 달팽이’에게 집은 그렇게 휴대용이어야 했던 것이다.
바퀴가 상징하는 휴대성과 유목성은 공공미술에도 등장하는 키워드가 됐다. 예컨대 바퀴 달린 트레일러에 커다란 거울을 싣고 달리며 미국 곳곳을 비추는 개념의 공공미술 ‘미국을 위한 기념비’(2024) 등 신작 모형에도 투영이 된다.
두 번째는 스펙터클한 설치물이 없다는 데서 오는 아쉬움이다. 작가의 말대로 영상과 도면, 모형이 거의 전부다. 물론 2010년 리버풀 비엔날레의 ‘다리를 놓는 집’, 2012년 광주 비엔날레의 ‘틈새호텔’ 등 과거 현장에서 실제 구현한 거대한 설치 작업은 축소 모형과 당시를 보여주는 영상으로 대체하는 게 이해가 간다. 그런데 신작 역시 아이디어를 담은 영상과 모형으로 제시했다. 어떤 모형은 영원히 아이디어에만 머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예컨대, 정치적 영웅의 동상이 반전된 땅속에 거꾸로 매달린 동상 이미지는 반기념비적 성격이 신선하지만 실현 자체는 불가능해 보인다. 빈 좌대를 수많은 군중이 옮기는 공공미술 모형은 충분히 실현 가능해 보이지만 역시 모형으로만 제시돼 있다.
2022년 ‘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 시리즈’ 중견작가에 선정된 설치미술가 최우람이 ‘작은 방주’전에서 지푸라기로 된 몸체들이 육중한 철판 원탁을 끊임없이 움직이는 키네틱 조형물을 구현해 낸 것과 대조적이다. 성신여대 조소과 박사과정 정아사란씨는 “설치 미술가가 자신이 상상한 사이즈로 작품을 구현해내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크기가 주는 감각과 경험이 있기 때문”이라면서 “그래도 그가 과거 아이디어를 실제로 구현한 작가였던 만큼 저 모형이 현실화되면 어떤 느낌일까 상상하는 즐거움이 컸다”라고 말했다.
앙증맞은 모형이 제시하는 가상의 세계는 매력적이긴 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서도호 특유의 에너지는 빠졌다. 아이콘이 된 ‘천으로 만든 집’을 대체할, 파워 넘치는 새 브랜드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그래서인가. 서울, 뉴욕, 런던의 세 꼭지점인 북극해에 완벽한 집을 짓는다는 황당한 구상을 도면과 애니메이션등으로 담아낸 영상 ‘다리 프로젝트’(2024)가 돋보였다.
글·사진=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