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칼레의 시민’인가? 폐자재로 변주한 서양 조각사

입력 2024-10-09 03:32
심승욱 작 ‘지나간 시간 속에 남겨진 5개의 군상’.

검은 비닐을 뼈대에 대강 휘감아 세운 것뿐인데 군상이 연상된다. 어느 순간, 로댕의 그 유명한 군상 조각 ‘칼레의 시민’이 떠오른다. 자세히 보면 뒷짐 지듯, 고개를 떨구듯, 팔이 축 처진 듯 비닐을 묶은 방식이 치밀하게 계산돼 있다. 그저 여럿 세워둔 비닐 기둥에서 미술사 걸작이 연상되는 것은 그런 정교함에서 연유할 것이다.

서울 종로구 평창32길 김종영미술관에서 하는 심승욱 개인전 ‘흐르는 시간 속 지워지지 않는 질문들’에 나온 작품들은 이렇듯 미술사를 참조하고 있다. 전통적인 모더니즘 조각 재료인 돌, 나무, 청동 등이 아니라 비닐, 폐자재 등을 쓴다는 점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적이다.

항공적재용 검은 비닐을 씌운 이 조형물은 인체보다 커서 구부정하게 선 몸체에서 느껴지는 비애감이 배가된다. 포장작업을 하는 대지미술가 크리스토 자바체프에게서 영감을 받은 작가는 자신의 작업 재료로 군용 장비를 덮는 검은 비닐을 가져왔다. 자바체프가 폭력을 위장하는 보이지 않는 실체로서 포장 작업을 했다면 심승욱은 형상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최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이번 전시는 잊힌 기억을 주제로 하고 있다”며 “시간이 지나며 기억은 흐릿해지고 모호한 형상으로만 존재한다는 걸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비닐을 벗겨내고 뼈대 그 자체만이 갖는 조형성을 보여주는 새로운 연작도 나왔다. 목재에 아이소핑크 단열재를 붙여 날것의 피부 같은 구조물이 거대한 인체처럼 서 있는 작업이다. 이는 이탈리아 미래주의 필리포 마리네티의 ‘승리의 여신’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또 마르셀 뒤샹의 회화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를 재해석한 조형물 등 미술사의 변주를 보는 즐거움이 있다. 이번 전시는 김종영미술관이 촉망되는 작가에게 수여하는 ‘오늘의 작가’ 수상 기념전이다. 27일까지.

글·사진=손영옥 미술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