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그램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CEO) 파벨 두로프가 지난 8월 성착취물 유포 등 추악한 범죄를 방조한 혐의로 붙잡힌 장소는 프랑스의 한 공항이었다. 암호화 기술을 기반으로 비밀 대화 서비스를 만든 두로프가 표현의 자유를 신봉한다는 프랑스에서 검거됐다. 두로프는 18년 전 러시아에서 SNS 서비스를 제공하는 프콘탁테(VK)라는 회사를 만들어 성공했다. 반정부 인사에 관한 정보를 넘기라는 러시아 당국의 요구를 거부하는 등 갈등을 빚던 그는 2014년 러시아를 떠났다. VK 지분을 처분한 뒤 뛰어든 게 메신저 앱 텔레그램 사업이었다. 텔레그램은 현재 9억명 넘게 이용한다.
‘러시아의 저커버그’이자 표현의 자유를 지킨 영웅으로 추앙받던 그는 갖가지 의혹의 중심에 있다. 프랑스 국적 취득을 놓고는 특혜 의혹까지 불거졌다. 프랑스 여권을 발급받은 과정은 두로프가 지난해 4월 자신의 텔레그램 채널에서 직접 과시하듯 밝혔다. 비서가 그에게 프랑스 시민이 됐으니 프랑스식 이름을 만들어야 하지 않느냐고 농담조로 권했다고 한다. 이에 폴 뒤 로브(Paul Du Rove)라는 성명을 프랑스 당국에 제출했고, 여권이 별문제 없이 나왔다는 것이다. 프랑스 국적 취득 전 여러 차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을 만난 사실도 알려졌다. 마크롱 대통령이 텔레그램 본사를 프랑스에 두는 방안을 두로프에게 제안했다는 의혹도 불거졌다. 마크롱 대통령과 두로프 간 어떤 약속이 이뤄졌는지 알 수 없지만, 두로프가 인맥을 동원해 까다로운 국적 취득 절차를 건너뛰었다는 의혹은 개연성 있어 보인다. 두로프는 러시아를 뜬 이후에도 50차례나 러시아를 찾은 것으로 파악됐다. 러시아 정부와 두로프 간 모종의 정보 거래가 있었을 거라는 의혹이 무성하다. 러시아 정부가 프랑스 검찰의 두로프 체포에 반발했다는 점도 이런 관측을 뒷받침한다. 유럽뿐 아니라 어느 국가와도 협력하지 않은 듯했던 두로프가 뒤로는 사익 추구에 열을 올렸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텔레그램은 최근 손바닥 뒤집듯 보안 정책을 바꿨다. 범죄 피의자로 확인되면 전화번호와 접속 정보를 관련 당국에 공개할 수 있도록 정책을 변경했다. 한국 측 협조 요청에는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반응했다. 텔레그램은 지난달 방송통신심의위원회와 핫라인을 개설한 이후 디지털 성범죄와 관련한 방통위 측 삭제 요청을 이행했다. 딥페이크 영상물 수사와 관련해 한국 경찰과도 대화를 시작했다. n번방 사건 같은 반인륜적 범죄 수사 협조도 외면했던 텔레그램이 처음으로 한국 측에 응답한 것이다. 텔레그램의 변화는 프랑스에서 추가 조사 진행 후 본기소 여부를 판단하는 예비기소 처분이 두로프에게 내려진 시점을 전후로 나타났다. 형사처벌 위기에 처한 CEO를 돕기 위한 제스처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이는 텔레그램이 금과옥조처럼 내세웠던 표현의 자유가 허울뿐이었다는 점을 자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텔레그램이 당장 위기를 모면한 뒤에도 협조적인 스탠스를 유지할지 지켜봐야 할 부분이다. 플랫폼 기업의 불공정한 이윤 추구를 단속하는 일에도 속도를 냈으면 한다. 텔레그램은 엄격한 유해 콘텐츠 단속 의무를 부여하는 초대형 온라인 플랫폼 지정을 피하려고 이용자 수를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는 의혹과 관련해 유럽연합(EU) 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대형 플랫폼을 독과점 사업자로 지정해 규제 수위를 높일 수 있도록 하는 사전지정제 도입조차 불발됐다. 유튜브, 넷플릭스 등 글로벌 기업은 국내에서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지만 정보통신망 사용료를 부담하지는 않는다.
김경택 사회부 차장 pty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