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그 판정의 정상화가 한국 농구 전체 발전에 조금이나마 기여를 할 수 있다면 그게 저의 마지막 행복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오랜 지도자 생활을 마치고 행정가로 변신한 유재학 한국농구연맹(KBL) 신임 경기본부장이 새로운 목표를 설정했다. 그는 새 시즌 예고한 판정 기준의 변화를 통해 농구 팬들이 더욱 빠르고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경험하도록 한다는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
유 본부장은 “장기적으로는 한국 농구의 기술적 발전을 꾀하는 게 목표다. 이번 시즌에 농구가 후퇴하지 않고 더욱 재미있어져야 한다”며 “관중이 늘어 체육관이 가득 차는 모습을 보고 싶다. 경기 운영 파트가 관중 수 증가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응당히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유 본부장은 프로농구를 대표하는 명장 출신이다. 지난해 3월 지도자 은퇴 전까지 18년간 울산 현대모비스를 이끌며 역대 최다 6회 우승, 정규리그 최다 724승 등의 대기록을 남겼다. 1만 가지 이상의 수를 가진 ‘만수’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하다. 사실 지휘봉을 놓은 뒤 농구판에 다시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장기간 떨어져 지낸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단지 쉬고 싶다는 마음도 컸다고 한다.
유 본부장은 지난달 30일 서울 강남구 KBL센터 집무실에서 가진 국민일보와 인터뷰에서 “사령탑을 그만 둔 뒤 아무 생각 없이 휴식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농구계에 발을 들였다”며 “감독 시절 리그의 심판 판정을 두고 고민스러웠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직접 바꿔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고민 끝에 본부장직을 수락했다”고 밝혔다.
그는 매일 농구 코트 대신 사무실로 출근하는 예상치 못한 삶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유 본부장은 “행정은 처음이지만 농구라는 같은 테두리 안에서 하는 일이라 재미있다”며 “살을 맞대고 지내는 심판진이 너무 열심히 잘 따라와 줘서 저 또한 의욕이 생긴다. 무언가 갈수록 잘 하고자 하는 마음이 커지고 있다”며 옅은 미소를 보였다.
2024-2025시즌 KBL 정규리그는 오는 19일 개막한다. 유 본부장은 개막 전부터 ‘정상적인 몸싸움의 허용’을 강조하고 있다. 공격자가 수비자의 정당한 몸싸움에도 고개나 팔을 뒤로 젖히는 비정상적 행위로 파울을 얻으려 하는 행위를 막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그는 리그 판정의 전반을 바꾸는 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동안 비정상으로 이뤄졌던 판정 기준을 바로잡아 농구의 흥미를 저해하는 요소를 없애겠다는 생각이다.
유 본부장은 “KBL은 파울 콜이 너무 자주 나오고, 코트에서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는 몸싸움을 허용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다는 생각이 있었다. 불지 않아도 되는 콜을 불어서 경기 흐름이 자주 끊기면 지루해진다”고 말했다. 물론 공격자의 실린더를 침범하는 신체 접촉 등 수비자의 명백한 반칙은 휘슬이 불린다.
한때 국가대표팀 감독까지 지냈던 유 본부장은 정상적인 몸싸움을 허용하는 판정 기준이 선수 및 리그의 국제 경쟁력 향상에도 도움을 줄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국제대회 코트에선 선수끼리 ‘퍽! 퍽!’하는 소리가 날정도로 격한 몸싸움을 흔히 볼 수 있다”는 설명을 곁들였다.
그간 국내 선수들은 상대적으로 강한 몸싸움을 용인하는 국제농구연맹(FIBA) 주관 대회에서 고전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결국 KBL 코트와 판정 기준이 다른 국제무대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서 생기는 일이다.
유 본부장은 “공격자가 수비자의 적극적인 몸싸움에 가로막힐 때는 드리블이나 스텝을 바꿔서 충분히 이겨낼 수도 있는데, 한국에선 그런 기술들이 안 나오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공중에 뜬 상태로 수비자와 신체 접촉이 일어날 땐 공격자가 몸을 뒤틀거나 팔의 방향을 바꿔 마지막 순간까지 득점을 노리는 플레이가 농구의 묘미 중 하나다. 비명부터 내지르며 심판에게 파울 콜을 바라면 재미가 반감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판정 기준이 바뀌는 만큼 시행 초기 적응하는 과정에선 유·불리한 상황에 따라 각 구단이나 팬들의 불평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 농구의 발전 차원에서 ‘몸싸움의 정상화’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게 유 본부장의 생각이다. 그는 “동일한 잣대에서 보겠다는 게 저의 뜻이자 목표다. 그런 부분들은 믿어줬으면 좋겠다”며 “추후 제가 경기본부장직에서 내려오더라도 리그의 발전을 위해 몸싸움 관련 판정 기준은 일관되게 계속 가져가야 한다는 생각”이라고 강조했다.
새 시즌 KBL은 심판의 전문성 강화 카드를 꺼내들었다. 전임 심판이 기존 18명에서 21명으로 늘었다. KBL 심판부는 비디오 룰 미팅과 강도 높은 체력 훈련을 병행 중이다. 심판 전담 트레이너가 배치됐고, 자체 재활 시스템까지 도입됐다. 선수와 구단, 팬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도록 ‘판정의 일관성’을 높이기 위한 전략이다. 경력이나 전문성 차이가 나는 선·후배 심판들을 한 조로 묶어 훈련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유 본부장은 “KBL 심판을 대상으로 어느 때보다 많은 미팅과 체력훈련,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 각 심판마다 성향과 판정 기준이 다를 수 있지만, 그 기준을 좁혀서 최대한 일관되게 나오도록 한다는 계획”이라고 말했다. 특별히 체력훈련을 시행한 배경에 대해선 “심판도 경기 막판에 체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집중력이 떨어져 잘못된 판단이 나올 수 있다. 3인 1조로 나서는 주·부심들의 호흡이 맞아야 한다는 생각도 들어 팀워크를 키울 수 있는 훈련도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감독이 4쿼터 또는 연장쿼터에 자신의 팀에 선언된 개인파울에 대해 1회의 비디오판독(IRS)을 요청할 수 있는 ‘파울 챌린지’도 신설됐다. 기존엔 터치아웃이나 골텐딩, U-파울 여부 등에 대해서만 실시됐다.
유 본부장은 “발생하지 않는 게 옳지만 경기 막판 승부를 좌우할 수 있는 오심이 나올 수도 있다. 심판이 당당하게 파울 콜을 불되, 실수한 건 인정할 줄도 알아야 한다”며 “파울 챌린지 도입이 심판들의 실수를 줄이는 효과도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한국 농구는 국제무대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국가대표 선수 대다수가 KBL 소속이다. KBL의 프로선수들이 기량을 끌어올려야 대표팀도 반등할 수 있다는 얘기다. 다행히 유 본부장은 지난 7월 열렸던 한·일 대표팀의 두 차례 평가전을 보고 희망을 봤다고 했다.
그는 “우리 국가대표 선수들이 우연찮게 젊은 피로 구성됐었는데 정말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결국 팬들은 승패보다도 선수들의 투지에 감동한다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고 말했다.
유 본부장은 “결국 리그에서 잘하는 선수들이 모여 대표팀을 이루지 않나. 연장선상에서 보면 KBL 심판진이 선수들의 성장을 돕는 밑거름 역할을 할 수 있고, 대표팀 발전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며 “한국 농구가 도약할 기회는 다시 올 거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구인 기자 capta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