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어김없이 개신교 각 교단의 총회가 열렸다. 개교회의 대표자로 구성된 노회에서 다시 총대를 뽑아 보내는데 정작 교인들은 총회가 열리는지 모르고, 알아도 관심이 없다. 목사님, 장로님이 출장을 다녀와서 별다른 소식을 전하지도 않는다. 더 당혹스럽게도 많은 개신교인은 자신이 어떤 교단에 속했으며, 교단들의 차이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조직과 체계는 민주적이지만 그렇게 작동하지는 않는 셈이다.
교단 총회는 명목상 회의가 아니다. 개신교회 구조에서 성도에게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결정을 총회가 담당한다. 각 교단의 법이나 신학적 입장, 각종 사업과 재정안이 총회에서 최종 결정되고 그에 대한 유권해석도 내려진다. 몇 년 전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 총회는 유아 세례를 받은 어린이의 성찬 참여에 대한 지침을 마련했다. 올가을 예장 합동 측 총회는 몇 년간의 논의와 망설임 끝에 여성 강도권을 인정하는 중요한 결정을 했고, 통합 측 총회는 총회 건물 건축에 진 빚을 갚기 위해 재난구호 기금을 잠시 빌리겠다는 다소 황당한 결정도 내렸다. 목사의 정년 연장도 교단 총회의 단골 논의 주제이고 각종 단체나 교회, 개인에 대한 이단 시비도 총회에서 가린다.
이런 형식적 중요성과 역할에도 불구하고 총회에 등장하는 인물의 면면과 실제 논의의 현장은 실망스럽다. 표절, 세습, 불륜 등 세상 사람도 부끄러워하는 일을 저지르거나 의심받는 이들이 단상에 올라 감히 종교개혁을 입에 담는다. 여성 성도 수가 남성보다 훨씬 많은데도 총회 참석자는 거의 남자이고, 발언의 수준은 종종 귀를 의심할 정도로 저열하고 성차별적이다. 논의 주제도 전혀 감동적이거나 인상적이지 않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교회가 산 위에 있는 마을처럼 드러나게 할 방안이나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는 사명, 고아와 과부를 섬기는 일에 대한 논의는 열심히 하지 않는다. 대신 교회 세습, 정년 연장, 이단 시비, 여성 안수, 성소수자 문제처럼 교회 내부의 질서나 다툼, 세상을 야단치는 일에만 열중한다. 그나마 진전도 작전도 없다. 세습금지법은 있으나 세습은 용인하고, 목사 안수의 허용과 무관하게 여성은 침묵을 강요받는다. 세상이 왜 교회를 비난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없고, 악법을 막는다며 내놓은 작전이 고작 머릿수로 세상을 겁박하는 것이다. 교단 총회가 교회 안팎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대표자가 개교회에 돌아와 할 말이 없는 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은 더 큰 문제다. 그렇지 않아도 교회 안의 청년들은 총회의 존재를 모르는데, 총회 역시 청년들에 대해 관심도 없다. 급변하는 외부 세계의 기술적·문화적·정치적 변화를 평가, 분석하기는커녕 가부장적 과거를 향한 그리움만 간절하다. 교단 정치의 철저한 현상 유지 욕망과 기득권 다툼에 청년과 미래의 자리는 없다. 교회 안이나 밖에 아무런 본이 되지 않고, 의미 있는 논의도 안 하고, 성도의 외면도 아랑곳하지 않는 교단 총회에 하나님께 바친 헌금을 낭비해야 하는가? 이들이 대표자라며 내리는 결정을 믿고 따르는 것이 타당한가? 차라리 교단과 무관하게 건전한 개교회를 세우려 노력하는 것이 성도의 양심을 지키는 데 더 나은 방법이 아닐까?
성도 수가 급감하고 젊은이가 떠나는 개신교회의 위기를 타개하려면 교단 총회 개혁이 필요하다. 총회의 구성과 역할, 논의의 내용을 현저하게 바꾸지 않으면 한국 교회의 미래는 암울하다. 미래 세대에게 자기 존재의 근거를 제시할 수 없는 교단과 총회는 차라리 없는 게 낫겠다. 종교개혁이 교회 안의 개혁운동이었다는 것이 새삼스러운 10월이다.
손화철(한동대 교수·글로벌리더십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