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입학 후 들어보지도 못한 작가들의 책이 쏟아져 나왔다.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1988년 잇따라 납북 또는 월북 문인들의 해금(解禁) 조치가 발표된 덕분이었다. 상허 이태준의 문장에 반했고,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에도 빠졌다. 이념과 같은 정치적 기준을 문학에서 제거하고 온전히 작품을 향유할 수 있는 좋은 시절이었다. 한동안 잊고 살았다. 최근 ‘여행지에서 만난 한국문학’을 읽으며 아직은 우리가 이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흔적을 발견하면서 조금은 놀랐다.
홍명희의 생가는 충북 괴산에 있다. 안내판에는 홍명희가 아닌 그의 부친 홍범식을 내세워 ‘홍범식의 고택’으로 안내돼 있다고 한다. 홍범식은 경술국치에 격분해 자결한 순국열사였다. 90년대 중반 주민들이 ‘소설 임꺽정 작가 벽초 홍명희 생가’란 간판을 세웠지만 보훈단체의 반발로 사라지고 ‘의사 홍범식 생가’로 바뀌었다가 지금도 홍명희의 이름은 빼앗긴 상태다. 홍명희는 괴산 만세운동과 신간회 창립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였다. 광복 후 월북해 북한 내각 부수상을 지낸 전력 때문에 88년 해금 조치에서도 제외됐다.
내친김에 북한을 선택했던 문인을 소개하자면 이태준이 대표적이다. 광복 후 남한 과도정부에 실망한 이태준은 월북을 선택했다. 소련파 후원으로 소련을 다녀온 뒤 기행문을 쓰고, 6·25전쟁 때 종군기자로도 활동했다. 미군에 대한 원수를 백배 천배 갚자는 ‘백배 천배로’, 겁 많은 병사가 용기 있는 전사로 바뀌는 과정을 그린 ‘누가 굴복하는가 보자’, 빨치산 대원이 고향에 잠입해 임무를 수행하고 귀대하는 과정을 그린 ‘고향길’ 등을 발표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소련파 숙청 와중에 탄광촌으로 추방되고 쓸쓸히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시의 아버지’로 불리는 정지용은 전쟁이 터지고 피란을 가지 못해 서울에 남아 있다가 사라졌다. 월북인지 납북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오랜 기간 대한민국에서는 그의 시들은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진보 정권의 집권이 거듭되면서 월북 작가들의 논란이 사라지는 사이 친일 논란 문인들의 시련이 시작된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2005년 대통령 직속으로 설치됐고 민간 주도로 친일인명사전도 준비됐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와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됐다.
대표적인 친일 문인으로 언급되는 이는 미당 서정주다. 사실 그는 친일 확신범이었다. ‘동양의 자각’을 강조했던 서정주는 일제의 대동아공영권 논리에 동조했다. 27세 서정주는 자발적으로 다쓰시로 시즈오로 창씨개명하고 태평양전쟁을 찬양했다. 징병과 학병의 참여를 독려하는 시와 평론도 발표했다. ‘가장 눈부신 모국어의 빛살로 시의 산맥을 이룬 한국 최대의 시인’이라는 칭송의 한편에는 친일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닌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메밀꽃 필 무렵’의 이효석은 경성제대 졸업 후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일제 사상 통제의 최일선 기관인 경무국 검열계에서 일하기도 했다. ‘삼대’의 작가 채만식은 한때 친일 글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늘 오점으로 생각했다. 광복 후 농사나 짓겠다며 전북 군산 고향으로 낙향했고, 48년에는 자전소설 ‘민족의 죄인’을 통해 민족 앞에 자신을 비판하고 반성했다. 하지만 채만식의 생가터는 표지석만 있고 복원 작업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친일 행적 논란 때문이다.
문재인정부 시절에는 ‘죽창가’로 대표되는 반일 정서가 지배했다. 윤석열정부에서는 홍범도 흉상 논란에서 보듯 다시 이념을 들고나왔다. 내년은 광복 80주년이고 지난해는 6·25전쟁 정전협정 70주년이었다. 언제까지 친일과 이념의 덫에서 헤매게 될지 예상하기도 힘들다.
맹경환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