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림택권 목사의 지성을 그리스도에게로] 살아간다는 것은 만나는 것이다

입력 2024-10-03 03:04

“살아간다는 것은 만나는 것이다.”

유대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가 한 말이다. 어떤 이는 많은 사람을 만나지 않지만 깊고 좋은 만남으로 지속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폭넓은 만남을 유지하기는 하나 깊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기도 한다. 개개인의 성격과 인생관에 따라 만남의 가치를 다르게 부여하기 때문이다. 하찮은 것 같은 만남이 일생에 있어서 중요한 계기가 되거나 축복이 된 경우도 꽤 많은 것 같아서 옆에서 보기에도 흐뭇하다.

만남에는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소망이 있다. 만남을 통해 불분명했던 자신을 확인하고 ‘나’라는 자아를 보게 되며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식하기도 한다. 우리는 만남 속에서 성숙해지며 삶을 더 구체화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고 수정같이 투명하고 보석처럼 귀할 수도 있다. 반대로 기억하거나 간직하고 싶지 않은 만남도 있다.

아람 왕의 나아만 국방장군은 부러울 것 하나 없는 사람인데 불행하게도 그는 한센병 환자였다. 얼마 전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아서 장군의 아내에게 수종을 들게 했다. 그는 여주인에게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칠 수 있나이다”라고 했다. 왕은 나아만의 말을 듣자 이스라엘 왕에게 보낼 편지와 선물을 갖고 가라고 허락한다. 장군은 곧 달려갔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엘리사 선지자를 통해 순종하므로 치료를 받았다.(왕하 5:1~27) 포로로 붙잡힌 어린아이와 장군의 만남! 우연일까.

빌립보 교도소에 투옥된 바울은 이런 기회도 하나님이 주셨다고 믿었다. 이 사건을 통해 평소에는 만날 수 없는 로마 황제를 측근에서 호위하는 근위대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기뻐했다. 빌립보서에는 16차례나 “기뻐하라”고 했는데, 투옥된 사람이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권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빌 4:21~22) 바울의 전도 열매로 근위대원이 몇 명 정도 포함됐을까를 생각해 본다.

대개 편지를 보낼 때는 자신을 소개하는데,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우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복음을 위해 택정받았다’고 나온다. 모두 수동형(passive)이지 자신이 원해서 되는 능동형(active)이 아니다.(롬 1:1)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소개한다.(고전 1:1) 역시 수동형이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는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부터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가 됐다”(갈 1:1)고 나온다. 에베소교회에 드리는 인사에서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가 됐다”(엡 1:1)고 하고, 빌립보서에는 “그리스도 예수의 종”(빌 1:1)이라고 나온다. 이렇듯 자신의 정체를 확인하는 것은 나를 만드시고 세상에 보내신 분과 만날 때인데, 이처럼 정확한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거나 찾으려는 분과 만나게 되면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잠 27:17) 서로 행복해진다.

빌레몬서는 AD 60년쯤 바울이 로마 교도소에 투옥됐을 때, 골로새 교인과 옛 친구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다. 그 내용은 주인 재산을 훔쳐 도망친 오네시모가 교도소에서 바울을 만나 크리스천이 됐고, 바울은 전도로 얻은 성도들을 “자기가 낳았다”고 하는데, 신자가 된 후에도 계속해서 신앙을 챙긴다는 부모의 마음으로 들린다.

이 편지에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용서한 후로 종이 아닌 형제로 받아들였다. 전에는 무익했으나 지금은 유익하니 믿음의 형제로 용서해 달라는 화해의 간청이었다. 특히 오네시모가 경제적으로 피해를 줬으면 바울 자신이 갚겠다고도 한다. 오네시모와 바울의 투옥 과정에서 만난 것은 과연 우연이었을까.(몬 1:25)

림택권 목사(웨이크신학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