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 ‘의례’마저 사라지는 한국 정치

입력 2024-10-03 00:34

의례는 반복을 통해
사회에 안정감 주는 닻

국회 개원 파행, 반쪽 광복절
대통령·여당 대표 만남도
순탄치 않은 ‘신기록’의 연속
무정부 상태 같다는 말까지

법 조문 의존, 가혹한 공격이
정치의 본령 아니다

품위 있는 의식과 상징의
힘 아는 정치인을 갈망한다

해마다 영국 의회의 회기 시작을 알리는 의회 개회식(State Opening of Parliament)은 지상 최대의 ‘정치 쇼’라고 불린다. 정교하고도 장엄한 의식은 현장에 있지 않고 TV 등으로 시청하는 이들도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왕은 기마의장대가 호위하는 황금마차를 타고 버킹엄궁전을 떠나 웨스트민스터 상원 의사당에 도착한다. 왕의 왕관과 두 개의 황금홀도 각각 별도의 행렬로 도착한다.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왕이 의원들 앞에서 주요 입법·정책 과제를 발표하는 연설이다. 물론 입헌군주제 국가인 만큼 연설문은 정부·여당이 작성한 것이다. 지난해 9월 개회식에서 찰스3세는 모친인 엘리자베스 2세의 서거로 70년 만에 ‘여왕의 연설(Queen’s speech)’이 아니라 ‘국왕의 연설(King’s speech)’을 했다.

이 요란스러운 행사는 찰스1세 때인 16세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 영국 내에서도 ‘이런 겉치레가 언제까지 계속돼야 하느냐’는 비판이 있다. 하지만 역사와 전통에 뿌리를 둔 장려함이 자부심과 열광을 이끌어내고 영국인의 정체성을 확인케 하는 것은 분명하다.

미국에서는 매년 1월 말∼2월 초 대통령이 상하 양원에서 국정연설(State of Union)을 한다. 대통령이 그해의 대내외 정책 목표를 의회와 국민에게 알리는 상징적인 정치 행사다. 영국같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엄숙하며, 의식은 엄격하고 세밀하게 규정돼 있다.

정치에서 상징과 의례의 힘은 생각보다 훨씬 세다. 정치권력의 획득과 공고화는 물론 국민의 정체성 형성과 통합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니 이를 넘어선다. ‘인간은 의례를 갈망한다’의 저자인 인류학자 디미트리스 지갈라티스에 따르면 의례는 모든 인간 사회 제도의 핵심이다. 지갈라티스는 직접적·명시적 효과는 없으나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오리라 믿고 행하는 인간의 활동을 의례(ritual)라고 규정한다. 의례는 일회성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거듭되는 반복성, 매번 똑같은 방식으로 행해야 하는 엄격성이 특징이다.

한국 정치에서도 의례가 행해지고 있지만 그 강도와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박약하다. 최근 정계에서 벌어지는 ‘신기록’들은 그나마 빈약한 수준인 한국의 정치 의례가 고사 위기에 처했음을 알리는 경고음이다. 22대 국회는 임기 시작 96일 만인 지난 9월 2일 가장 늦은 지각 개원식을 열었다. 의원 선서도 없이 석 달 넘게 의정활동을 한 것인데, 불법은 아니지만 상식과 관행 파괴다. 윤석열 대통령은 민주화 이후 개원식에 불참한 첫 대통령이 됐다. 국회 개원식에 대통령이 꼭 참석해야 한다는 법규는 없다. 하지만 4년 만에 새로 구성된 국민의 대표기관에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의 참석은 당연하다. 무엇보다 민주화 이후 모든 역대 대통령이 의원들의 선서를 지켜보고 축하 연설을 했다. 대통령실 주장대로 야당 의원의 ‘망신주기’가 실제 벌어졌다면 민심은 국민통합의 장에 훼방을 놓은 야당을 힐난했을 것이다.

독립기념관장 인사 갈등으로 광복절 경축식이 반쪽 난 것도 그렇다. 한 세대가 넘는 일제의 긴 억압 끝에 해방됐음을 기념하는 행사는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가장 밀접한 국가 의례다. 이런 의미에서 대통령이 독립기념관장 정도의 인사 문제로 이런 분란을 ‘허용’했다는 게 도대체 이해되지 않는다. 야당 또한 기념관장 인선에 대한 불만이 국가 의례를 보이콧할 정도의 이유가 되느냐는 일각의 싸늘한 시각에서 자유롭지 않다. 대통령과 야당 당대표가 아니라 여당의 당대표와 한 번 만나는 게 이토록 어렵고,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뉴스가 된다는 것도 한국 정치에서 의례가 무너지고 있다는 강력한 징표다.

의례는 같은 것을 통해, 반복을 통해 삶을 지속가능하게 한다. 끊임없이 흔들리고 급변하는 현실에서 의례는 인간에게 안정감을 주는 닻과 같다. 연대감을 제공하는 사회의 접착제다. 정치에서 의례가 지금처럼 무너져 내리면 국민들의 국가와 공동체에 대한 믿음은 사라진다. 각자도생만이 살길이라는 인식이 표준이 된다.

한국은 지금 무정부 상태 같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정치에서 의례의 실종과 관련이 깊다. 법조문을 이 잡듯이 뒤지고 온갖 논리를 동원해 상대를 가혹하게 공격하는 게 정치의 본령인가. 절제와 경건함이 배인, 품위 있는 의식과 상징의 힘을 인식하는 제대로 된 정치인을 국민들은 갈망한다.

배병우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