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신의 눈만으로는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존재다. 자신의 얼굴을 보려면 거울이 필요해진다. 보편적 인식을 지향하는 철학은 우리 인생에서 자신의 존재방식에 대해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해줄 수 있다. 자기중심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인간 인식의 한계이기는 하지만 자기중심적으로 인식하는 정도가 높은 것과 낮은 것은 많은 차이를 가져온다. 자기중심적 인식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는 사람은 없지만 자기중심적 인식을 최대한 덜 하려고 노력할 수는 있다.
인간이 생각을 할 때 인식의 사각지대에 들어가는 부분은 대체로 자기 자신에게 불리한 부분, 스스로 보고 싶지 않은 부분이다. 남들 눈에는 뻔히 보이는데 나에게만 안 보이는 인식의 사각지대는 나의 소망과 무의식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다. 그렇기에 보편적 인식을 지향하면서 인식의 사각지대를 파악하려 노력하다보면 자신의 소망과 무의식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인식의 사각지대는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자신이 이중논리를 구사하지는 않는지 지속적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나에게 적용하는 논리와 타인에게 적용하는 논리가 달라지지 않도록 노력하다 보면 자신의 인식의 사각지대를 보게 된다. 왜 그 지점에서 그렇게 이중논리를 구사하게 되는지 의식할 수 있게 된다. 인식의 사각지대가 형성되는 이유는 무의식과 연결돼 있다고 했다. 무의식은 대체로 저열하다. 오죽하면 의식의 표면 위로 올라오지 못한 채 무의식이 되었겠는가! 인간은 자신의 인식의 사각지대를 인식하려고 노력하면서 무의식을 의식으로 통합해나가야 한다. 무의식을 의식으로 통합해나가지 않으면(무의식을 의식화하지 않으면) 타인의 무의식만 보면서 타인들은 모두 이상하고 자신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착각하기 쉽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무의식보다 타인의 무의식을 들여다보는 데 더 유능하다. 무의식이라는 것이 원래 내가 의식할 수 없어 무의식으로 돼 버리는 것이니 당연한 일이다. 내 무의식은 내 눈에 잘 안 보인다. 내 눈에는 타인의 무의식만 보인다. 그렇다면 타인의 눈에는 나의 무의식이 보일 것이다. 당연한 논리지만 이 당연한 논리를 사람들은 자주 의식하지 못한다. 지금 당장 자신에게 보이는 타인의 무의식에 혀를 끌끌 차기가 바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인의 무의식을 볼 때 ‘내가 네 속 다 들여다본다’에 그치면 안 된다. ‘나에게 너의 무의식이 보인다면 너에게는 나의 무의식이 보이겠구나’가 오히려 우리가 봐야 할 진실이다.
타인의 내로남불에 복장 터져보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저렇게 자기가 자기를 몰라’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기실 나 역시 누군가에게는 자기를 모르는 사람 중 한 명일 뿐일 것이다(죄송하다, 철학은 팩폭의 학문이다!). 자신의 인식의 사각지대를 밝히려는 노력은 자신의 무의식을 보게 하고 자기 자신을 알게 한다. 인생의 목적이 자기 자신을 알아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자아실현)이라고 할 때 이를 가장 잘 도와주는 학문은 보편적 인식을 지향하는 철학이다.
박은미 철학커뮤니케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