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코너] 허울뿐인 중국의 ‘쌍백방침’

입력 2024-10-02 00:32

1956년 4월 28일, 마오쩌둥 당시 중국 국가주석은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백화제방 백가쟁명’이 우리의 방침이 돼야 한다. 예술 문제에서는 백화제방하고 학술 문제에서는 백가쟁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춘추전국시대에 제자백가들이 자유롭게 논쟁하면서 학문과 문화의 꽃을 피웠음을 가리키는 ‘백화제방 백가쟁명’이 현대 사회주의 중국에 되살아난 순간이었다. 중국은 이를 ‘쌍백방침’으로 명명하고 예술 발전과 과학 진보를 촉진하는 지침으로 삼았다.

쌍백방침은 마오 사후 개혁·개방과 함께 꽃을 피웠다. 1980년대에 완전하진 않지만 상당한 자유의 공간이 열리면서 인문학에선 중국근대화·문화논쟁 등 백가쟁명의 시대가 열렸다. 1989년 천안문사태 이후 한풀 꺾였지만, 현행 중국 고교 역사교과서는 여전히 ‘오늘날 우리에게도 백가쟁명의 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시진핑 국가주석도 2014년 10월 문예사업 좌담회를 주재하면서 “백화제방 백가쟁명의 방침을 견지해야 한다. 학술민주, 예술민주, 긍정적이고 건강하면서 여유 있고 조화로운 분위기를 조성해 서로 다른 관점과 학파의 충분한 토론을 제창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2016년 5월에는 철학사회과학 심포지엄에서 ‘이론과 지식의 혁신’ ‘학문적 민주주의의 견지’ ‘차이의 존중과 다양성 포용’ 등을 강조했다.

하지만 오늘날 중국의 현실에선 쌍백방침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최근 중국 국무원 직속 싱크탱크인 사회과학원 경제연구소의 소장과 부소장, 당 서기가 무더기 교체됐다. 홍콩 성도일보는 이곳 주헝펑 부소장이 당중앙에 대해 망언을 한 혐의로 엄중 처분을 받았다고 전했다. 부패나 간첩 같은 불법행위가 아니라 설화 때문에 정치적 숙청을 당한 셈이다. 지난 7월에는 2500만 팔로워를 가진 중국의 대표적 관변 논객인 후시진 전 환구시보 편집장이 당중앙의 뜻을 왜곡했다는 이유로 SNS 계정 차단 조치를 당했다.

두 사건 모두에서 어떤 내용이 문제였는지, 어떻게 왜곡했는지 설명이나 토론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중앙의 뜻을 왜곡하지 않으려면 자기 생각이 아니라 당 기관지와 똑같은 목소리를 내야 한다. 당국이 비공식적으로 설정하는 ‘레드라인’도 눈치껏 파악해야 한다. 대만 독립 지지, 공산당 체제 비판뿐만 아니라 시 주석 등 지도부나 ‘애국열사’에 대한 비판도 레드라인이다. 학문적으로는 중국 현대사의 비극인 문화대혁명에 대한 연구도 레드라인이다. 허웨이팡 전 베이징대 법학원 교수는 지난 6월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당이 문혁을 거부한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문혁에 대한 연구도 금지한 것은 아쉽다”고 말했다. 연구가 봉쇄돼 문혁의 실체를 제대로 알리지 못하면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감정의 광기에 또다시 휘말릴 수 있다.

1956년 마오가 처음 쌍백방침을 주창했을 때 지식인들은 바로 호응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진의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오가 ‘열린 비판과 다양한 사상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고 관영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한 뒤에야 대자보와 격서 등으로 당과 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은 곧 국가를 전복하려는 우파 집단으로 내몰렸다. 1957년 7월부터 2년간 이어진 반우파 투쟁 과정에서 약 55만명의 지식인이 정치범수용소로 추방됐다. 서방 학자들은 마오의 쌍백방침이 반대파를 색출하기 위해 이들을 기만한 고도의 음모라는 분석까지 내놨다. 지금 중국은 한편으로는 쌍백방침을 부각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개인의 생각과 의견에 대한 레드라인을 거미줄처럼 촘촘히 짜고 있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토론은 교과서에만 찾을 수 있다. 백화제방 백가쟁명의 시대는 점점 더 멀어져간다.

송세영 베이징 특파원 sysoh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