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대학도시, 16년 만의 민주당 승리 안겨주나

입력 2024-10-02 01:11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이 30일(현지시간) 워싱턴DC의 연방재난관리청(FEMA)을 방문해 허리케인 '헐린'에 피해를 입은 지역에 대한 지원을 약속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공화당 주지사 후보에 대해 알아봤는지 모르겠다. 그 사람 덕분에 민주당 카멀라 해리스가 이기게 될 것 같다” 지난 28일(현지시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UNC) 채플힐 캠퍼스에서 만난 엘리엇 데이헌(77)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하며 “이번 대선의 최대 이슈는 34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도널드 트럼프와 모든 정신 나간 사람들을 (공직에서) 치워버리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가 말한 공화당 주지사 후보는 마크 로빈슨(현 노스캐롤라이나 부지사)이다. 로빈슨은 과거 자신을 ‘블랙 나치’라고 칭하며 노예제를 부활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트럼프의 대권 가도에 찬물을 끼얹는 중이다.

노스캐롤라이나주는 전통적 공화당 강세 지역이다. 민주당은 1980년 이후 대선에서 2008년을 제외하고 단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곳에서 민주당을 상징하는 ‘푸른 바람’이 불고 있다. ‘제2의 실리콘밸리’라고 불리는 리서치트라이앵글파크(RTP) 지역을 중심으로 민주당 성향이 짙은 고학력·젊은 유권자들이 늘면서 공화당의 압도적 우위가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 가뜩이나 초박빙인 대선 레이스에서 로빈슨 막말 논란이 확산되면서 승패를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트럼프가 9월 21, 25일 연거푸 노스캐롤라이나를 찾은 것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UNC에서 만난, 생애 첫 투표를 앞둔 리암(18)은 “여성의 재생산 등 개인의 자유와 권리 측면에서 해리스에게 더 마음이 기울고 있다”며 “젊은 유권자들은 여성 인권, 팔레스타인 전쟁 등 거의 모든 문제에서 트럼프에 반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스캐롤라이나에선 삼각형 모양의 RTP를 중심으로 UNC가 있는 오렌지카운티, 듀크대가 있는 더럼카운티 등이 민주당의 핵심 지지 기반이다. 2020년 대선 때 조 바이든 대통령은 노스캐롤라이나를 트럼프에게 내줬지만, 이 지역에서만큼은 70~80%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이 지역에선 갑작스럽게 후보가 된 해리스를 향해서도 기대가 컸다. UNC 인근에서 만난 데이비드 앤드루스(48)는 “해리스는 정상적인 인물이다. 그는 안정을 상징하지만 트럼프는 불안정한 사람”이라며 “해리스가 대통령이 되면 대법원에 합리적인 판사들이 임명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바이든 행정부의 경제정책이 인기가 없다는 평가에 대해서도 “인플레이션은 미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금씩 완화되고 있다”고 반박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조지아주 발도스타의 허리케인 피해 현장을 찾아 정부 대응을 비판하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하지만 민주당 지지율이 압도적인 대학 도시들은 공화당 우위인 농촌 지역에 포위된 ‘섬’과 같다. 대학 도시들과 주도인 롤리, 샬럿 등 대도시를 제외하면 노스캐롤라이나 대부분 지역에서 트럼프 지지가 압도적이다. 2020년 대선 때 노스캐롤라이나 대부분 농촌에서 트럼프 득표율은 50~70%대를 기록했다.

대학 도시들을 조금만 벗어나자 여론도 확연히 달라졌다. 시골에선 무엇보다 경제 문제를 지적하는 이들이 많았다. 오렌지카운티와 경계를 맞댄 퍼슨카운티의 록스보로에서 만난 알렉스(40)는 해리스를 겨냥해 “3년 반 동안 자기가 망친 것을 이제서야 고치겠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경제가 제일 문제다. 휘발유 가격이 지붕을 뚫었다. 갤런당 1.9달러 하던 것이 거의 4달러까지 치솟았다”면서 “트럼프에게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경제가 어떻게 돼 왔는지만 살펴본다면 상식적으로 트럼프가 당선될 것”이라고 말했다.

록스보로에서 만난 또 다른 백인 남성도 “경제가 최우선 순위”라며 “바이든 집권 내내 경제는 끔찍했다. 나는 건설 관련 회사를 운영 중인데 지난 3년간 단 한 푼도 모으질 못했다”고 말했다.

공화당원들은 조기 투표를 독려하며 텃밭 사수에 나섰다. 공화당 퍼슨카운티 지부 책임자인 피제이 젠트리는 “트럼프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지만 선거는 국가에 관한 문제”라며 “트럼프는 경제적으로나 세계 무대에서나 우리를 훨씬 더 나은 위치에 올려놓은 실적이 있다”고 강조했다.

최근 초대형 허리케인 ‘헐린’이 노스캐롤라이나를 강타해 피해 규모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것은 돌발 변수로 꼽힌다. 헐린의 직격탄을 맞은 노스캐롤라이나 서부 지역은 공화당 강세 지역이다. 트럼프는 민주당 소속 로이 쿠퍼 노스캐롤라이나 주지사가 공화당 우세 지역을 돕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며 선거 쟁점화를 시도하고 있다. 피해 상황이 심상치 않자 바이든 대통령은 노스캐롤라이나를 직접 방문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노스캐롤라이나는 대학 도시의 지지를 발판으로 대역전을 노리는 해리스, 농촌의 힘으로 텃밭을 지키려는 트럼프의 대결로 한 치 앞을 예측하기 어려운 구도로 흘러가고 있다. 현지에서는 “결국 지난 4년간 유권자 인구구조의 변화가 판세를 좌우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조심스럽게 나온다.


여론조사에선 해리스가 선전하고 있다. 9월 27일 CNN 조사에서 해리스와 트럼프 지지율은 각각 48% 동률을 기록했다. 같은 날 블룸버그 조사에선 해리스가 50%를 얻어 트럼프(48%)를 2% 포인트 차로 앞섰다.

채플힐(노스캐롤라이나)=임성수 특파원 joyls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