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공사판에서 망치질하는 삶

입력 2024-10-02 00:34

글쓰는 목수, 전문적 이야기
쓸 줄 모르지만… 땀 흘려야
끼니 보장받는 삶 알리고 싶어

열 명의 증명사진을 바둑판으로 배열했다. 다섯 명씩 두 줄. 말끔하게 정장 차려입은 중년 남성 여덟 명에 여성 한 명이 있다. 대체로 피부가 맑고 헤어라인이 단정하다. 안경 쓴 사람도 많다. 세보니, 여덟 명이나 썼다. 사진 밑에 이름과 함께 적힌 직업(직함)에서 가장 많은 교수가 네 명이었다. 호기심에 더 찾아봤는데, 나머지 사람 중 다섯 명도 박사이거나 대학원에서 공부했거나 자기 분야에서 20~30년씩 일한 전문가다.

이 바둑판식 사진 배열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게, 남은 한 명이었다. 독보적으로 까무잡잡한 피부에 안경 없는 맨눈으로 카메라를 뚫을 듯 응시하고 있던. 결정적으로 안전모까지 썼다. “으잉?”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 그 사진 속 인물은, 맞다, 나였다. 책 두 권 내고 작가 소리 듣는 게 민망해서 ‘글 쓰는 노가다꾼’이라 말하고 다니는데, 친절하게도 내 이름 옆에 ‘작가’라고 적어 놨다. 그렇게 누가 봐도 오피니언 리더인 전문가들 사이에 육체노동자가 하나 꼈다.

연예인도 아니면서 때때로 내 이름을 검색해 본다. 막연히 글 쓰는 삶에 내 책 읽은 독자 리뷰는 빛과 소금이어서 평소처럼 검색창을 열었던 날, ‘오피니언면 새 필진 새 단장… 국민일보가 더 풍성해집니다’라는 기사를 만났다. 새 필진을 소개하는 기사 안에 내 이름과 그 바둑판 사진이 있었다. 노파심에 미리 말하자면 문제 삼겠다는 거 아니다. 흥미로웠다. 그들과 나란히 놓인 내 사진에 괜히 머쓱해하다가, 우리 사회의 일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 묘한 기분도 들었다.

어쨌거나 기사와 사진을 보고 하나는 확실해졌다. 뭘 써야 할지. 안 그래도 고민이었다. 자유롭게 주제를 택하면 되는데, 알겠지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게 ‘아무거나’다. 하여, 꽤 오래 끌던 고민이 사라졌다.

난 여느 오피니언 리더처럼 많이, 깊게 배우지 못했다. 박사는커녕 지방대 학사 겨우 수료했다. 그렇다고 또 누구처럼 특정 분야에서 20~30년 근무하며 전문적인 지식을 섭렵한 것도 아니다. 그냥, ‘글 쓰는 목수’다. 지금보다 젊을 때 기자로 일했으니 글쓰기 훈련이 좀 됐나 모르겠다. 목수 경력은 미천하다. 인력사무소 드나들며 ‘잡부’로 시작해 이제 망치질한 지 7년 됐다.

그러니까 박학다식한 이들의 전문적인 이야기는 알지 못하고 쓸 줄 모른다.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얘기는 딱 하나이지 싶다.

정장과 구두 대신 작업복에 안전화로 무장하고, 단정한 헤어라인 대신 안전모 눌러쓰고, 안경 대신 선글라스(또는 보안경) 너머로 세상을 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내 책 ‘노가다 가라사대’에서도 썼듯이, “거친 기계음과 뿌연 톱밥이 뒤엉키고, 몸과 몸이 부딪치고, 서로의 땀을 비벼가며 건물을 한 층 한 층 쌓아 올리는” 이야기.

실은 글과 함께 게재할 사진을 보내달란 말에 현장에서 안전모 쓴 사진을 건넨 것도 그래서였다. 사진이 먼저 말해줄 듯했다. 정장 입고 구두 신고 명품시계 차는 삶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 찢어진 청바지에 안전화 신고 만 원짜리 전자시계 차는 삶도 있다는 것, 그런 삶이 심지어 행복할 수도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여기 있다는 것을. 말 나온 김에, 공사판에서 망치질하는 삶이 뭐 그리 행복하냐고 물을지 모르겠다. 나는 다른 책 ‘노가다 칸타빌레’에서 이렇게 답했다.

“세상사, 어떤 일이든 남을 속이거나 적어도 과장해서 말하게 된다. 글 쓰는 삶도 예외가 아니다. 어떤 취재를 하든 어떤 글을 쓰든 내 감정이 실릴 수밖에 없으니, 감정에 따라 글을 보태거나 덜어낸다. 노가다는 그렇지 않다. 몸을 써서 움직여야 무거운 걸 옮길 수 있고, 그게 확인되어야 일당을 받을 수 있다. 단순하고 명확하다. 거짓이나 꾸밈이 없다. 지금은 이런 재미와 보람을 느끼며 살아간다. 몸 쓰고 땀 흘려야 끼니를 보장받는 삶 말이다.”

송주홍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