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향유에 창작 지원까지… 정부, 장애예술가 날갯짓 보듬는다

입력 2024-10-02 04:07
국민일보가 장애 예술 현장을 찾아간다. 장애인들이 복지 지원 대상을 넘어 창작의 주체가 되어 예술인으로서의 꿈틀거리는 욕구를 실현할 수 있도록 장애 당사자와 함께 부모, 비장애 전문가, 정부, 기업 등 사회 각 주체가 어떤 활동을 벌이고 있는지 그 현주소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한국 장애예술의 지형도를 그리는 한편, 해결해야 할 미완의 과제는 무엇인지 점검한다.

올 봄 모두예술극장 무대에 오른 연극 ‘젤리피쉬’의 한 장면. 다운증후군 여성의 사랑을 다뤘다. 모두예술극장 제공

한때 서울에서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가장 많이 보이는 지역은 여의도였다. 1989년 생겨난 한국장애인개발원(전신 한국장애자복지체육회)이 한국의 맨해튼이라 불리는 여의도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어서다. 지금은 대학로가 ‘장애인 해방구’로 통한다. 2015년 3월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이하 장문원)이 생겨난 덕분이다. 한국장애인개발원이 복지에 초점을 맞춘다면 장문원은 문화예술의 창작과 향유에 관심을 쏟는다.

장문원 출범과 함께 운영을 뒷받침하는 실질적인 공간인 이음센터가 그해 11월 개관했다. 이듬해 장문원 예산 10억원이 확보되면서 바야흐로 한국에도 장애인들이 복지를 넘어 예술가의 꿈을 키우는 시대가 본격화됐다.

매년 1월 공모 준비 진풍경


장문원의 살림 규모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문화체육관광부의 장애 예술 관련 보조금이 이관돼오면서 규모가 커졌다. 덕분에 예산은 2019년 140억원으로 크게 늘었고, 이후 매년 증가하며 2024년에는 320억원을 넘었다.

재원을 쥔 장문원과 이음센터의 가동은 한국 장애 예술계의 풍경을 바꾸고 있다. 장문원의 주요 사업으로는 교육 및 인력 양성, 접근성 개선 및 교류·협력, 이음센터 운영 등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현장 체감도가 높은 것은 공모 사업이다. 공모 형식을 통해 장애인의 창작과 제작을 돕고 아트페어와 축제를 지원한다. 해마다 1월이면 예술가를 희망하는 장애 자녀를 둔 부모들은 몸과 마음이 분주하다. 장문원이 주관하는 공모전에 공모 서류를 내기 위해 머리를 싸맨다. 2019년 199건이던 공모 사업 건수는 지난해 265건으로 늘었다.

신경다양성을 가진 금채민 작가의 어머니 송원숙씨는 30일 “장문원의 창작 지원 공모 사업에 당선돼 두 번이나 개인전을 할 수 있었다”며 “개인전을 할 수 있다니 꿈만 같았다”고 말했다.

향유를 넘어 예술가가 되고 싶은 열망

정부의 장애인 정책이 복지와 향유를 넘어 예술 창작 주체가 되는 걸 돕는 창작지원으로 정책적 대전환이 나오기까지 장애인 활동가들의 지난한 아픔과 투쟁의 시간이 있었다. 장문원 2대 이사장을 지낸 안중원(현 문화창조기지 이사장)씨는 그 마중물이 된 사건을 2006년 장애인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장예총)의 결성으로 꼽는다. 민간 차원에서 장애인의 문화 예술 활동을 활성화하자는 뜨거운 열기가 모여 이익단체를 결성한 것이다.

시간이 흐르며 민간을 지원하는 정부 기관이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난관이 버티고 있었다. 당시 문화예술진흥법상 관련 기관을 세울 법적 근거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장예총에서 관련 재단을 만들고 문체부가 이를 승인하는 ‘묘수’를 취해 재단법인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이 출범할 수 있었다.

장문원의 초기 활동도 갤러리, 연습장, 소공연장 등을 갖춘 이음센터의 출범에서 보듯이 장애인 예술가들의 창작을 지원하는데 방점이 찍혔다. 그리고 이 같은 정부의 장애인 창작 지원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장애예술인 표준공연장 모두예술극장의 탄생이다.

투쟁의 산물…모두예술극장의 탄생

지난해 10월 개관한 모두예술극장 전경. 모두예술극장 제공

장문원에서는 장애예술인의 문화예술 활동에 대한 실태조사를 정기적으로 실시한다. 2021년 실태조사에서 작품을 발표하고 전시하고 공연할 시설의 부족(25%), 작품을 창작하고 연습할 공간의 부족(23.9%)이 가장 큰 불만으로 꼽혔다. 안 이사장은 사단법인 한국장애인문화협회를 운영하며 2005년 ‘장애인나눔연극제’를 추진했을 당시의 경험담을 털어놓으며 열악했던 현실을 실감나게 전했다.

그는 덜컥 연극제를 하겠다고 나섰지만 대회를 개최할 극장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동이 불편한 장애인 예술가에게 적합한 극장을 찾느라 온 시간을 허비했다. 결국 서강대 메리홀 대극장에서 하게 됐는데, ‘배리어프리’ 개념이 없던 시절이라 ‘그 시절 에피소드’가 많았다.

“휠체어를 탄 배우가 분장실에서 분장을 마치고 나오면 무대로 올라가야 하지만 램프 경사로가 없었어요. 그러니 장정 몇 사람이 휠체어를 번쩍 들어 올려줘야 했습니다. 자유롭게 퇴장도 못 하니까 무대 끝에 막으로 가려놓고 대기 상태로 두는 거죠. 그러다 입장할 때면 막 뒤에서 다시 나오고…”

객석에도 휠체어석이 없어서 의자를 뗐다가 공연이 끝나면 원상 복귀시켜야 했다. 공연을 하려면 목수를 대동해야 했다. 안 이사장은 “장애인이라며 장소 대관도 잘 해주지 않아 인심 좋은 시골에 가서 관객도 없이 우리끼리 해야 하나 자조하던 시절이었다. 우리라고 세종홀, 국립극장에 안 가고 싶었겠냐. 대관 자체를 해주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장애인 창작자가 연극을 만들면 속도가 보통보다 아주 느리다. 시간이 배 이상 걸린다. 거기다 창작자들을 위한 전문 협력 인력이 배치돼야 하고 행정시스템도 받쳐줘야 한다. 조명, 음향, 무대 감독 등 스태프들이 장애인의 신체적 상태를 고려한 디자인을 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런 욕구와 필요가 모여서 서울 충정로에 모두예술극장이 지난해 10월 개관하게 됐다. 기존 구세군아트홀 건물을 리모델링해 탄생한 모두예술극장은 전체 공간을 평평하게 해 장애인 접근성을 높였고, 분장실과 무대 간 이동로를 확보하고, 무대 기술 조정실에 휠체어 접근이 가능하도록 했다.

장애예술인과 단체에 우선 대관하고 사용료를 할인해 장애예술인이 무대에 오를 기회가 크게 확대됐다. 다운증후군 여성 ‘켈리’의 사랑과 출산을 통해 장애인의 독립과 자유를 유쾌하게 그린 작품 연극 ‘젤리피쉬’, 시각장애인과 비시각장애인이 함께 즐길 수 있고, 전시와 퍼포먼스를 결합한 새로운 형식의 공연 ‘어둠 속에 풍경’ 등이 무대에 올랐다.

국립극장에서 상연한 배리어프리 연극 ‘틴에이지 딕’. 국립극장 제공

배리어프리가 예술계 키워드가 되면서 국립기관도 달라지고 있다. 국립극장은 2022년 9월 음성해설사와 수어통역사가 배우로 함께 출연해 장애·비장애 관객의 몰입을 유도하는 뮤지컬 ‘합체’를 처음 자체 제작해 상연했다. 이어 세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를 뇌성마비 고등학생 이야기로 재탄생시킨 연극 ‘틴에이지딕’ 등 지속적으로 배리어프리 공연을 하고 있다.

윤석열정부 들어 장애예술정책을 체계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문체부는 장애인문화예술과를 지난해 말 신설했다. 정부와 공공기관의 노력이 장애예술가의 꿈을 밀어가고 있다.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