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이 뭐가 중요해요? 나쁜 사람이 사라졌다는 게 중요하지.”
최근 방영을 시작한 SBS 드라마 ‘지옥에서 온 판사’에 등장하는 대사다. 죄인을 잡아 지옥으로 보내기 위해 악마가 판사의 몸에 들어왔다는 판타지 설정의 드라마인데, 판사가 된 악마가 자신의 심판 방식을 옹호하며 내뱉는 말이다.
그는 법정에서 각종 이유를 대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솜방망이 판결을 내린다. 진짜 심판은 그 다음이다. 풀려난 피고를 찾아가 피해자에게 저지른 나쁜 짓을 똑같이 겪어보게 한 뒤 처단하는 식이다. 끔찍한 데이트 폭력을 행사한 남성, 보험금을 노리고 남편을 살해한 여성에게 그대로 갚아주는 장면은 지나치게 잔인해 지켜보기 불편할 정도다. 하지만 법정 밖에서 이뤄지는 독한 응징 장면에 통쾌함을 느낀다는 이들이 적잖다. 법정의 지루한 진실 공방이나 법리 다툼보다 범죄자에게 저지른 만큼 갚아주는 사적 제재에 더 환호하는 시대상을 보여주는 셈이다.
재판을 담당하는 법원과 판사에 대한 불만이 요즘처럼 미디어와 SNS를 통해 공공연히 표출되던 때가 있었나 싶다. 드라마뿐 아니라 형사재판 기사에도 “피해자가 판사 가족이라도 이렇게 판결했겠냐”며 울분을 터뜨리는 댓글이 제법 많다. 정치인 재판을 놓고는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극단적인 반응이 나온다. 판사의 과거 판결은 기본이고, 가족관계·학력·경력 등 개인정보까지 훑어대는 신상털이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그야말로 갈수록 판사 노릇 하기 어려운 환경인 셈이다.
법원 환경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2011년 도입된 법조 일원화 제도는 사회 경력이 짧은 판사들로 인한 사법 불신을 해소한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인력 수급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법관 고령화라는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낳았다. 법관의 평균 연령은 2010년 38.9세에서 지난해 44.6세까지 상승했다. 20대 초임 판사를 찾기 어려워졌고, 이런 인력 구조는 재판 지연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국회는 지난주 판사 임용을 위한 법조 경력 조건을 10년에서 5년으로 완화하는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사법개혁 후퇴라는 시민단체의 비판도 없지 않지만 2024년 현시점에서 필요한 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고육지책에 가깝다고 평가하고 싶다. 법원의 만성 질환이 돼버린 재판 지연을 해소하기 위한 법관 증원까지 포함해 이제부터 국민 눈높이에 맞는 법원을 만들 방법을 찾으라는 요구가 반영됐다는 얘기다.
사회 전 분야에서 MZ세대의 등장은 직업 선호 지형은 물론 직업윤리에도 적잖은 변화를 가져왔다. 공무원 교사 같은 직업이 외면받고, 의료계에서도 필수의료 인력 구하기가 갈수록 어렵다. 공적 가치를 추구하기보다 사적 이익을 좇는 삶이 훨씬 영리하다고 평가받는 시대가 됐다.
법조계 역시 성적 좋은 순서대로 판사를 지망하던 ‘엘리트 법관’ 시대가 막을 내린 지 오래다. 로펌에서 안정적 보수를 받던 변호사들이 경제적 손해를 감수하면서 판사직에 갈 이유를 찾기 어려운 시대라지만, 판사란 직업에 자긍심을 가진 인력을 법원으로 유인할 길을 찾아내야만 한다. 이를 위해 법원 스스로 좋은 법관을 확충할 방안을 연구하고, 지원할 시스템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배석판사가 써온 판결문을 부장판사가 고쳐주며 가르치던 도제식 교육훈련 방식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시대가 아무리 어렵더라도 여전히 판사는 법에 따라 우리 사회의 약자와 소수자를 보호하는 중대한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정의롭고 용감한 판사가 내린 좋은 판결은 늘 세상을 보다 나은 쪽으로 바꾸는 출발점이 됐다. 이번 법안 통과가 국민 신뢰를 회복할 사법부 출발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 법률 지식과 실력을 갖춘 것은 물론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공감 위에서 진정한 의미의 ‘사이다 판결’을 내리는 판사들을 드라마가 아니라 실제 현실에서 더 많이 보고 싶다.
김나래 사회부장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