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면식도 없는 여고생을 흉기로 살해한 ‘묻지마 살인범’이 술에 취해 범행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심신미약으로 인한 ‘주취 감형’을 노리려는 의도가 아닌지 우려스럽다. 하지만 가해자가 스스로 통제 불가능 수준으로 술을 마셔 범죄 위험을 높인 것을 고려하면 주취 감경은 어림도 없다. 오히려 주취로 가중 처벌해야 할 일이다.
지난달 26일 밤 전남 순천시 대로변에서 30대 남성이 10대 여고생에게 흉기를 휘둘러 숨지게 했다. 살인 혐의로 구속된 남성은 “증거는 다 나왔기 때문에 범행을 부인하지 않겠다”면서도 “사건 당시 소주를 네 병 정도 마셔서 기억이 나질 않는다”라고 했다. 그러나 가해자가 흉기를 준비했고 범행 이후 도망친 점을 비춰볼 때 누군가를 해치려는 계획범죄 정황이 있다. 또 자발적인 음주행위는 자의적으로 심신장애를 유발한 것으로 주취 감경 사유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보는 게 마땅하다.
현행 형법은 심신장애로 인해 심신상실이나 심신미약 상태가 된 경우 그 행위를 처벌하지 않거나 형을 감경한다. 사물변별이나 의사결정 능력이 아예 없을 정도로 술에 취했을 경우도 포함된다. 2008년 초등학교 1학년을 성폭행하고도 주취 감경이 반영돼 징역 12년형을 받은 조두순이 대표적이다. 이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커졌고 주취 감경을 폐지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주취 감경 폐지 검토는 ‘윤석열정부 120대 국정과제’ 중 하나이고, 관련 개정안도 발의됐으나 국회 임기 만료로 자동 폐기됐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저지른 범죄는 더 무겁게 처리하도록 하는 개정안도 마찬가지다. 음주 상태에서 형법 상의 모든 죄를 범했을 때 심신장애로 인한 형의 감면을 적용하지 않고 각 죄에서 정한 형의 2배까지 가중 처벌이 가능하도록 하는 법안이나 이 역시 자동 폐기됐다. 22회 국회는 법안 발의부터 서둘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