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아연과 MBK파트너스·영풍 간 경영권 분쟁이 5조원에 육박하는 ‘쩐의 전쟁’으로 격화하면서 누가 이기든 ‘승자의 저주’를 피하기 어렵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공격과 방어에 들여야 하는 비용이 임계치를 넘고 있어 양측 모두 득보다 실이 큰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분석이다. 고려아연이 비철금속과 함께 신재생에너지·이차전지 소재를 미래 먹거리로 삼고 집중 투자 중인 ‘트로이카 드라이브’ 사업에도 제동이 걸릴 가능성이 커졌다.
29일 재계에 따르면 고려아연 경영권을 쥐려는 MBK파트너스·영풍과 이를 방어하는 고려아연에게 필요한 자금을 합치면 약 5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고려아연 공개매수 가격을 66만원에서 75만원으로, 영풍정밀 공개매수 가격은 2만원에서 2만5000원으로 인상한 MBK파트너스는 이번 분쟁에서 이기려면 약 3조6000억원의 자금을 투입해야 한다.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도 1조원이 넘는 돈이 필요한 상황이다. MBK파트너스와 영풍의 과반 지분 확보를 막기 위해 기존 우호 세력을 제외하고도 최소 6%의 지분을 추가로 늘려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 고려아연은 기업어음(CP) 약 4000억원을 발행했는데, 업계에서는 이를 경영권 방어를 위한 자금으로 해석한다.
지분 다툼 규모가 조 단위로 커지면서 누가 고려아연의 경영권을 인수하든 상당한 후폭풍을 맞을 것으로 관측된다. MBK파트너스는 NH투자증권과 영풍으로부터 약 1억8000억원을 이율 5.7%에 9개월 만기로 차입했다. 만기가 돌아오는 내년 6월까지 내야 하는 이자만 700억원대에 달한다. 최 회장 쪽도 녹록지 않다. 고려아연은 아직 구체적인 대항 공개매수 계획을 밝히지 않았지만, 일본 소프트뱅크와 한국투자증권 등이 백기사로 거론되고 있다. 고려아연 또한 급전을 조달하려면 시중보다 높은 금리를 조건으로 내걸 가능성이 크다. 누구든 눈덩이로 부푼 재무적 부담을 안고 고려아연을 경영해 나가야 하는 처지에 놓일 수 있다.
재계에서는 고려아연이 신사업으로 추진 중인 트로이카 드라이브 동력이 떨어질 가능성을 제기한다. 고려아연은 비철금속 전통 사업을 강화하면서 신재생에너지와 이차전지 소재 사업에도 진출해 성장 동력을 확보하겠다는 전략을 미래 경영 목표로 세운 상태다.
재계 관계자는 “어느 쪽이 경영권을 가져가든 인수에 쓰인 비용을 보전하기 위해 미래 사업 투자금에 손을 대는 상황이 올 수밖에 없다”며 “트로이카 드라이브를 포함한 고려아연의 신사업이 먼저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말했다.
Key word
승자의 저주(Winner's Curse)=경쟁이 치열한 경매나 입찰에서 최종적으로 낙찰을 받은 승자가 오히려 예상보다 높은 가격을 지불해 손해를 보는 상황을 뜻한다. 기업 인수·합병(M&A)에서 기업이 과도한 금액을 지불하고 인수한 후 실질적인 이익을 얻지 못하는 상황에도 쓰인다.
백재연 기자 energ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