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 재판관 인선 절차가 지연되면서 이른바 ‘헌재 10월 마비설’이 사실상 현실화했다. 이종석 헌재소장과 이영진·김기영 재판관 3명의 임기가 3주도 채 남지 않았지만 후임 인선이 여전히 안갯속인 탓이다. 여야 정쟁이 격화하면서 사법부의 한 축인 헌재 기능 마비 사태가 벌어질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29일 법조계에 따르면 헌재 내부에서 헌재 기능 정지 사태가 현실화됐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통상 재판관 인사청문회 등 절차에 한 달 정도 시간이 필요한 점을 고려할 때 헌재는 적어도 지난주 국회 추천이 이뤄지는 것을 마지노선으로 보고 있었다. 이 소장 등 재판관 3명 임기가 다음 달 17일까지로 18일밖에 남지 않아 공백이 불가피해졌다. 3명이 퇴임하면 재판관 6명이 남는다. 헌재법에 따라 헌재가 사건을 심리하려면 재판관 7명 이상이 출석해야 한다. 선고는커녕 변론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이번에 퇴임하는 3명은 국회 선출 몫이었다. 이 소장은 국민의힘 전신 자유한국당, 김 재판관은 더불어민주당, 이 재판관은 과거 원내교섭단체였으나 현재는 사라진 바른미래당이 각각 추천해 선출됐다. 관례상 국회 몫 재판관 3명 중 2명은 여야가 1명씩, 나머지 1명은 여야 합의로 선출했다. 국민의힘은 관례대로 하자는 입장이지만 민주당은 의석수대로 민주당이 과거 바른미래당 몫까지 2명을 추천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국민의힘은 “헌정질서를 마비시키려는 시도”라고 비판한다. 민주당은 재판관 추천 문제는 당장 시급한 이슈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민주당은 ‘정당한 추천권 요구’이며 다른 정치적 의도나 계산은 없다고 반박하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10월 내에 후임 재판관을 추천하기가 사실상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당장 쟁점 법안에 대한 재표결과 국정감사가 예정돼 있어 여야 합의점을 도출하기 난망한 상황이다. 헌재 내부에서는 여야 힘겨루기로 헌재 마비 사태가 장기화할 수 있다는 비관적 관측도 나온다. 헌재 관계자는 “내부적으론 다음 해 4월 문형배·이미선 재판관 퇴임 때까지 3명 공백 사태가 계속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그만큼 정치권이 헌재 결정의 중요성을 얕잡아보는 게 아니겠느냐”며 자조했다. 국회 몫 재판관 3인 선출은 국회 본회의 의결을 거쳐야 해서 170석 민주당이 반대하면 한 명도 선출할 수 없다.
법조계 일각에선 잇따른 탄핵소추를 주도한 민주당이 재판관 인선에 속도를 내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헌재 출신 한 법조인은 “사건을 헌재에 던져놓고 심리가 멈추는 건 신경 쓰지 않는 것인데 애초 정치적 의도의 탄핵이었던 것 아니냐”고 비판했다.
여권 일각에서는 야당이 헌재 기능을 정지시켜 탄핵소추 대상자들의 직무정지 기간을 계속 늘리려 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도 나온다. 재판관 공백이 현실화하면 현재 진행 중인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탄핵심판 등 심리가 중단되고, 직무 정지도 이어지게 된다. 곽규택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10일 김복형 헌법재판관 후보자 청문회에서 “다수당이 재판관 3명 임명 절차를 일부러 진행하지 않아 탄핵소추된 방통위원장 직무를 끝없이 정지되게 할 것이라는 얘기가 있다”고 말했다.
정치적 사건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의 기본권 침해 사건 처리가 지연될 것이란 우려도 커지고 있다. 그동안 헌재 사건처리 지연에 대한 지적이 쏟아졌다. 이 소장은 지난해 12월 취임 후 미제사건 등 처리에 집중했고, 헌재 통계상 지난해 11월 30일 기준 1544건이었던 누적 미제사건은 지난 8월 31일 기준 1215건으로 약 21% 줄었다. 하지만 헌재 업무가 멈춰서면 사건 적체는 다시 심화할 수밖에 없다.
이형민 김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