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차기 총리에 ‘온건파’로 평가받는 이시바 시게루가 취임하게 되자 국내의 일본 전문가들은 한·일 간 묵은 갈등인 ‘과거사 문제’를 해결할 기회라고 내다봤다. 다만 이시바 신임 자민당 총재가 당내 지지 기반이 약하다는 점에서 강경 보수파의 저항이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전문가들은 과거사 문제는 물론 안보, 경제 협력까지 이어가기 위한 정교한 외교 전략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강창일 전 주일대사는 29일 통화에서 “주일대사 근무 시절 이시바와 여러 차례 식사했었는데, 이시바는 친한적이고 과거 역사에 대한 인식도 분명한 사람”이라며 “윤석열정부가 의연하게 대처한다면 과거사 문제 등에서 얻어낼 것이 많다”고 말했다. 외교부 차관을 지낸 신각수 전 주일대사도 “이시바는 과거 잘못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인식을 가진 사람”이라며 “한·일 간 과거사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여지가 훨씬 많아졌다”고 설명했다.
이시바 총재는 태평양 전쟁 당시의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한·일 역사 인식의 비둘기파로 분류된다. 2019년 8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종료 결정 때는 자신의 블로그에 “일본에도 한국에도 오부치 게이조 총리·김대중 대통령 시대 같은 좋은 관계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글을 올리기도 했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를 필두로 한 ‘기시다파’의 지지도 긍정적인 대목이다. 이시바 총재는 한·일 관계 개선에 주력했던 기시다 총리의 기조를 이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신 전 대사는 “기시다 총리가 이시바의 손을 들어줬기 때문에 기시다 총리의 정책을 계승하고 한·일 관계를 잘 가져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만 자민당 내 강경 보수파의 반대 목소리가 주요 변수다. 최은미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이시바는 당내 본인 지지 세력이 너무 약하기 때문에 자신의 힘만으로 당을 움직이기 힘들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기태 통일연구원 국제전략연구실장도 “강경 보수파의 저항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과거사 문제 해결에 반대하는 일본 강경파의 목소리에 대응해 국내 여론을 모으고 일본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등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조언이 나온다. 최 연구위원은 “이시바가 한국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도록 한국 내에서 기반을 같이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강 전 대사는 “윤석열정부가 전략을 잘 짜면 과거사 문제도 풀고 경제 등 협력이 가능하다”고 했고, 이 실장은 “협력할 수 있는 부분, 특히 안보 협력을 제도화하고 공고화하는 것을 노력해야 한다”고 밝혔다.
내년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도 양국 발전을 한층 더 강화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주문도 나왔다. 신 전 대사는 “현재 한·일 관계가 좋아졌다고 느끼긴 하지만 구체적인 결실이 없다”며 “내년 국교 정상화 60주년이 양국 간 구체적 협력이 나올 수 있는 좋은 모멘텀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정책통’으로 분류되는 이시바 총재의 특성을 활용해서 한·일 간 정책 협력을 강화하는 식의 접근법도 거론된다.
최 연구위원은 “이시바가 관심이 큰 철도, 지역 상생 문제 등을 한·일 협력을 통한 정책으로 추진하는 방안도 제안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준상 기자 junwit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