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엘 찬양반주기 덕분에 사업은 탄탄대로를 걸었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국내 많은 업체가 추풍낙엽처럼 쓰러질 때도 우리 회사만큼은 건재했다. 오히려 장사가 더 잘 됐다. 해외 한인교회나 선교사들의 요청으로 수출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달러의 가치가 갑절이 됐으니 1대를 팔면 2대 값을 벌 수 있었다. 미국 교포들이 가정에서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야말로 불황 속 호황이었다. 꾸준히 제품을 업그레이드했고 새로운 모델을 내놓을 때마다 반응이 엄청났다.
다른 업체에서 미가엘 찬양반주기 같은 물건은 아예 내놓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적수가 될 수는 없었다. 미가엘 찬양반주기가 거둔 성공의 이유로는 여러 개를 꼽을 수 있는데 그중 하나는 멜로디였다. 멜로디가 뚜렷하게 들리는 게 최우선이고 그다음이 화음이나 전반적인 소리를 꾸미는 여타 사운드라고 생각했고, 이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현재 미가엘 찬양반주기를 통해 궁극적으로 구현하고 싶은 작업은 끊기지 않고 반주가 흘러나오도록 만드는 것이다. A라는 곡과 B라는 곡이 있을 때 그 사이에 어떤 여백도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 그래서 듣는 이의 감흥이 깨지는 일이 없도록 만드는 게 지금의 목표다.
과거 찬양 반주기 작업에 몰두하면서 동시에 다른 일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사업에만 모든 것을 집중했던 건 아니라는 뜻이다. 광주에서 처절한 실패를 경험하고 1981년 서울로 상경했을 때 나는 ‘밑바닥의 삶’이 무엇인지 체험할 수 있었다. 지독하게 가난했다. 땡전 한 푼 없이 일주일을 버틴 적도 있었다. 그때 언젠가 형편이 나아지면 어려운 사람들, 소외된 이웃들을 섬기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사업 초창기부터 나눔의 뜻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교두보가 돼준 곳은 내가 출석하는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였다. 시작은 교회에서 국내 선교를 담당하는 기관 중 하나인 사회사업선교회였다. 선교회 회원들과 함께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보육원이나 양로원, 나환자촌을 찾아다녔는데 그중 잊을 수 없는 장소가 경기도 고양의 벽제결핵원이다.
그곳엔 결핵 환자가 50명쯤 있었다. 매주 가서 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물질을 나누었다. 환자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과거 결핵원을 방문한 이들은 행여나 결핵에 감염될까 조심스러워 했지만 나를 포함한 우리 팀원들은 아니었다. 함께 음료수를 나눠 마시고 때론 손을 잡고 대화를 나누곤 했다. 격의 없이 어울리니 환자들도 우리를 반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4년 가까이 벽제결핵원을 수시로 방문했다. 언젠가 그곳에 갔을 땐 환자들과 의료진이 내게 감사패를 선물하기도 했다. 나는 다른 물건은 다 버려도 그 감사패만큼은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그들과 나눈 사랑과 위로의 시간을 잊을 수 없으니까, 잊어서는 안 되니까. 그렇게 사회사업선교회 부회장과 회장을 차례로 역임하면서 나눔의 기쁨을 실감하고 선교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사업이 얼마간 어려움을 겪던 때에도 봉사 활동엔 적극적으로 참여하곤 했다. 96년 장로에 피택된 뒤에는 더 책임감을 가지고 교회와 이웃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실감할 수 있었다.
정리=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