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힘으론 회복하기 어려워… 재난 트라우마 국가가 살펴야”

입력 2024-09-27 00:32
심민영 국가트라우마센터장이 26일 서울 광진구 국립정신건강센터 내 국가트라우마센터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심 센터장 뒤로 한국 사회에 큰 트라우마를 안긴 재난 사건이 기록돼 있다. 심 센터장은 “재난이 터지면 다들 ‘우리 지역에서 이런 일이 터질 줄 몰랐다’고 한다”며 “민방위 훈련처럼 상시적으로 재난 대응인력에 대한 교육과 지원을 통해 재난 대응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이병주 기자

재난은 피해 당사자뿐 아니라 유가족, 지역사회를 넘어 사회 전체에 큰 상흔을 남긴다.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등 사회적 재난은 정치화하면서 갈등과 반목을 낳았다. 대형 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생존자와 유가족을 돌보는 컨트롤타워가 되는 '국가트라우마센터' 역할도 커진다. 하지만 재난 대응 상황이 종료되면 관심도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이런 역사를 반복하며 국가트라우마센터는 과(科)도 없는 소규모 조직으로 버티고 있다.

심민영 국가트라우마센터장은 26일 서울 광진구 국립정신건강센터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재난이 갖는 정치적 속성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센터 업무는 더 전문적이어야 한다"며 "재난은 개인이 홀로 회복하기 어려운 부분인 만큼 심리적 타격도 국가가 지원해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심 센터장은 이화여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병원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 뇌영상학 분야 임상강사를 거쳐 국립정신건강센터 국가트라우마센터장을 맡고 있다. 경기도 안산 통합재난 심리지원단 유가족 지원팀장,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심리지원단장, 코로나19 통합심리지원단장, 이태원 사고 통합심리지원단장 등을 지냈다. 다음은 심 센터장과의 일문일답.

만난 사람= 김나래 사회부장

-재난당한 이들에게 국가가 심리지원을 하는 게 왜 중요한가.

“트라우마센터 명칭 앞에 ‘국가’가 붙다 보니 ‘재난에 왜 국가가 지원을 해야 하나’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재난이라는 속성상 개인 힘으로는 복구가 어렵다. 국가가 뭘 잘못해서 돕는 개념이 아니라 개인이 재난으로 인해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를 본 상황이기에 국가가 지원해야 하는 것이다. 재난 현장에서 심리지원은 단순히 정신 상담뿐만 아니라 재난 현장에서 필요한 모든 서비스를 파악해 연결하는 것이다.”

-이상기후 현상이 늘면서 자연재난 위험도 커지고 있다.

“과거에는 방제를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자연재난 빈도가 강해지고, 한 번 발생하면 인명 피해가 커지면서 인재(人災)의 성격도 더해지고 있다. 자연재해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취약계층이 많다. 한 번 타격을 받으면 복구가 어렵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관심이 더 중요하다.”

-지난 7월 발생한 ‘시청역 역주행 돌진사고’처럼 일상 공간에서 대형 인명 피해가 발생하면 트라우마가 더 크게 느껴진다.

“트라우마는 재난 상황의 ‘의외성’이 높을수록 타격이 크다. 일상적인 공간이고, 피해자 중 누가 신호를 위반한 것도 아니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차량에 벌어진 사고에 사상자 규모도 크다 보니 유가족들의 충격이 더 컸을 것이다. 유가족 중에는 ‘죽기 전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라며 자책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심리지원을 할 때는 ‘참혹함의 정도가 그 사람의 고통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는 말을 꼭 드린다. 자책이나 원망하지 않도록 돕는 게 중요하다.”

-희생자 죽음을 조롱하는 반응도 있었다. 2차 가해를 하는 이들의 심리는 무엇인가.

“스트레스를 이런 사건으로 분출하는 부류가 있다. 또 하나는 재난을 겪으면 사람들의 불안이 커지기 때문에 어떻게든 불안을 다스리려는 이유를 찾는다. 재난 피해자에게서 사고 이유를 찾는 식이다. ‘저 사람은 이태원에 가서 사고가 났다’ ‘저 사람은 돈을 벌러 한국에 왔다가 사고가 났다’고 하면서 ‘나는 아닐 거야’라고 생각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말이 되지 않는 행동이다.”

-2차 가해는 실제 유가족에게도 영향을 미치나.

“물론이다. 재난 상황에서 지나친 관심과 호기심은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금세 공격으로 돌변하고 비난과 혐오로 바뀐다. 특히 유가족은 본인 때문이 아닌데도 가족의 죽음을 자책한다. 이런 상황에서 악성 댓글이 달리면 당사자에게는 비수가 된다. 말 한마디로 사람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지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2차 가해 행위를 줄일 수 있다고 본다.”

-재난 상황에선 현장 협력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최근 지원한 화성 아리셀 공장 화재 현장에선 국가트라우마센터가 범정부 지원체계에 들어가서 정보를 공유받을 수 있었다. 그동안 다른 부처를 통해 정보를 받았는데, 행정안전부 지원으로 이번에는 처음부터 함께 참여했다. 유가족 정보부터 실시간으로 공유받다 보니 심리지원을 할 때도 수월했다. 재난이라는 속성상 누구도 위험을 부담하지 않으려 하고, 책임소재에 두려움을 느끼다 보니 부처별 행정 지원도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거버넌스가 안정되면 될수록 서비스가 좋아진다. 선입견 없이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온 사람’이라는 신뢰가 생겨야 심리 지원도 수월한데, 화성은 일단 자주 볼 수 있다 보니 심리지원을 받았던 분들 중에 좋은 피드백을 준 분이 많았다.”

-한쪽에선 재난을 잊자 하고, 누군가는 잊지 말자고 한다. 피해자 회복을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재난 대상자들은 희생이 무의미해지는 걸 견디기 힘들어한다. 이 사건의 영향은 시간이 갈수록 희미해지겠지만 ‘그래도 어떤 것 하나는 개선됐다’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대상자들이 재난을 너무 아프게만 기억할 게 아니라 힘을 합쳐서 조금 더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다. ‘이쯤 하면 됐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지만 계속하는 분들도 있다. ‘유족다움’을 강요해서도 안 된다. 개개인이 어느 선에서 멈출지를 강요할 수 없다. 각각의 방식을 존중해주는 문화가 필요하다.”

정리=김유나 기자 spr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