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는 기독교, 특히 예수 그리스도가 사랑과 함께 가르친 핵심 개념이다. 신약성경에도 용서를 강조한 예수의 말씀이 여럿 등장한다.(마 18:21~22, 눅 6:37, 골 3:13 등) 그렇지만 이해관계를 초월하는 기독교의 용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숱한 오해를 받아왔다. ‘당사자와의 소통 없이 하나님께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 종교’로 여기거나 ‘기독교인이라면 어떤 상황이든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는 인식이 대표적이다.
국민일보 ‘책과 영성’은 기독교 용서에 대한 편견을 깨고 그 정수를 알기 쉽게 담아낸 명저 2권을 소개한다. 이들 책은 김진혁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 교수와 민경찬 비아출판사 편집장에게 자문을 얻어 선정했다.
용서, 고통스러운 치유의 과정
“용서, 고통스러운 과정이나 그 끝엔 치유 있어”
“용서, 고통스러운 과정이나 그 끝엔 치유 있어”
영국성공회 사제이자 신학자인 스티븐 체리의 책 ‘용서라는 고통’(황소자리)에는 일본군 전쟁포로이자 고문 피해자인 에릭 로맥스(1919~2012)의 경험담이 나온다. 영국군 장교로 일본군에게 혹독한 고문을 당한 로맥스는 종전 이후에도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겪었다. 그러던 중 자신의 고문 현장에 있었던 통역관 나가세 다카시의 회고록에서 ‘태국 전사자 묘지에서 묵념하다 용서받은 느낌을 받았다’는 문장을 접한다. 로맥스는 자신의 회고록 ‘레일웨이 맨’에서 이때의 심경을 이렇게 남긴다. “신은 그를 용서했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를 용서한 적이 없다. 한낱 인간의 용서와는 완전히 다른 문제니까.” 훗날 로맥스는 태국에서 자신에게 사죄하는 나가세를 만나 그를 용서한다. 트라우마 치유 등 꽤 녹록지 않은 과정을 거친 뒤 이뤄진 용서다.
저자가 이 사례를 인용한 건 “모든 용서, 특히 진정한 용서라면 하나같이 어렵고 힘들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다. “용서는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부당한 상처에 자비를 보이려는 동시에 자신을 치유하려 애쓰는 반응”이기 때문이다.
용서를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보는 그에게 있어 “용서는 곧 고통”이다. 용서로 이르는 길에는 수많은 번민과 고뇌, 갈등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길의 끝에는 치유가 있다. 저자가 “용서가 가장 불가능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용서”라고 말하는 이유다.
책에는 홀로코스트 생존자, 남아프리카공화국 아파르트헤이트 피해자 등이 겪은 고통스러운 용서 과정이 소개돼 있다. 저자는 이들 사례를 전하며 ‘기독교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용서해야 하는가’란 질문을 던진다. 예수의 가르침 중 용서를 의무처럼 다룬 구절이 적잖아서다. 저자의 답이다. “용서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은 ‘용서할 수 없을 때도 무조건 용서하라’가 아닌 ‘악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사랑의 소용돌이로 들어가라’는 뜻이다… 따라서 질문은 ‘기독교인으로서 용서하는 마음을 가진 나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로 이해해야 한다.”
참된 용서의 원동력, 하나님
“하나님만이 정의와 참된 사랑으로 용서”
“하나님만이 정의와 참된 사랑으로 용서”
크로아티아 출신의 세계적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의 ‘베풂과 용서’(복있는사람) 역시 용서의 고통을 말한다. “용서는 어렵고 심지어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우리의 상처 입은 몸속 모든 원자가 정의나 복수를 부르짖는데 어째서 용서를 베풀어야 하는가.”
저자는 예수의 십자가 희생을 들어 인간이 본성에 반하는 용서를 왜 베풀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인간에게 한없이 “베풀고 용서한 그분이야말로 가장 신뢰할 만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선한 의지와 노력조차도 하나님의 것이기에 우리는 그분의 손에 들린 도구”라고 주장하는 저자는 용서 역시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 행위로 본다. “우리는 용서할 때 부적절한 판단과 교만으로 가해자에게 잘못하기 쉬우나 하나님은 정의와 참된 사랑으로 용서한다… 우리의 용서는 하나님이 하신 용서의 메아리로서만 가능하다.” 용서의 신학적 관점부터 실생활에서 용서하는 방법까지 다루는 진정한 ‘기독교 용서의 실용서’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