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웠던 명절, 정겨운 얘기 나누며 허전함 채웠어요”

입력 2024-09-26 01:11
지난 14일 부산 수영로교회에서 주최한 자립준비청년 대상 명절 모임에서 청년들이 전문가 지시를 따라 약산성 비누바를 만들고 있다. 수영로교회 제공

명절은 자립준비청년(보호종료아동)들이 쓸쓸함과 허전함을 유독 많이 느끼는 기간이다. 고향을 찾아 가족과 음식을 나누며 정겨운 시간을 보내는 추석이 이들에게는 그저 낯선 풍경이다. 자립준비청년은 가족이 없거나 가족과의 연결고리도 약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들이 추석 명절을 가족과 함께 보내는 따뜻한 시간이 아니라 긴 연휴 또는 휴일 근무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보육원을 거쳐 자립한 지 7년 된 김초원(26)씨는 25일 지난 추석 연휴를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보냈다고 말했다. 김씨는 “추석 당일에는 카페로 출근했고 남은 연휴에는 집에서 혼자 공예작업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며 “명절에 흔히 가족끼리 둘러앉아 음식을 나눠 먹는 풍경을 떠올린다고 하던데, 내겐 그런 명절의 이미지가 딱히 없다”고 말했다.

이처럼 홀로 지내는 명절에 익숙한 자립준비청년을 위해 추석 기간 특별한 시간을 마련한 이들이 있다. 부산 수영로교회(이규현 목사)는 추석 연휴 첫날인 지난 14일 자립준비청년을 위해 ‘함께’라는 주제로 명절 모임을 열었다. 이날 모임에는 15명의 자립준비청년이 함께했다.

모임은 약산성 비누바 만들기 체험 및 멘토링 시간으로 진행됐다. 수영로교회에는 멘토링 중심 자립준비청년팀인 ‘기대나무’가 있는데, 명절 기간 별도로 모임을 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모임을 기획한 최광용 자립준비청년팀장은 “몇몇 자립준비청년에게 ‘명절 때 무엇을 할 예정이냐’고 물어보니 대부분 집에 그냥 있겠다고 하더라”며 “외로운 명절에 다 같이 모여 즐겁게 시간을 보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모임을 열게 됐다”고 말했다.

수영로교회에서 명절을 보낸 자립준비청년들은 평소와 다른 연휴 풍경이 기억에 오래 남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모(25)씨는 “나를 포함해 보육원 출신 대부분은 명절 때 그냥 집에 있거나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축구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게 다였다”면서 “보육원에서 경험해보지 못했던 비누 만들기 등을 할 수 있어 좋았다”고 말했다. 이씨는 “앞으로도 명절 때 이런 시간이 계속 마련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연주(21)씨도 “예전부터 명절이 유독 제일 외롭게 느껴졌다”며 “그런데 이렇게 따로 시간을 내어 챙겨주니 편안하고 위로도 많이 됐다”고 말했다. 김씨는 또 “다음에는 명절 음식을 다 같이 만드는 시간을 가지면 더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명절 때 가족이 모여 함께 전을 부치는 흔한 모습이 이들에겐 더 아쉽고 부럽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수영로교회는 앞으로 명절 때마다 이런 모임을 꾸준히 열 계획이다. 최 팀장은 “내년 추석 연휴가 유독 길던데, 여건이 된다면 해당 기간에 자립준비청년들과 해외 선교지를 나가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말했다.

추석 연휴를 앞둔 지난 11일 서울 은평구에서 열린 '한마음 나눔 행사'에서 자립준비청년들이 과자를 만드는 모습. 은평구 제공

사회에 진출한 자립준비청년이 후배들을 위해 직접 추석맞이 행사를 기획한 사례도 있다. 추석 연휴를 앞둔 지난 11일 서울 은평구에서는 자립준비청년들을 대상으로 ‘한마음 나눔 행사’가 열렸다. 추석을 맞아 자립준비청년들이 ‘전통 간식 원데이 클래스’를 열고 직접 화과자, 오란다 등 전통 과자를 만들어 자신이 퇴소한 시설에 전달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행사를 마련한 건 은평구에 있는 ‘꿈나무마을 초록꿈터’ 출신 자립준비청년들이다. 현재 은평구청에는 시설 연장·퇴소 청년 2명이 인턴십 과정을 거치고 있다. 이 중 채모(23)씨는 “단 하루라도 다 함께 모여 명절 분위기를 내보자는 마음으로 기획안을 만들었는데 은평구에서 이를 좋게 보고 받아들여 행사를 열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행사에 참여한 청년들은 한자리에 모여 전통 과자를 직접 만들었고, 이번 행사를 위해 미리 제작한 옷을 나눠 입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초록꿈터 출신 박진혁(21)씨도 이날 행사에 참석해 후배들에게 과자를 전달했다.

경기도자립지원전담기관도 추석 연휴 직전에 자립준비청년들을 위한 시간을 마련했다. 이곳에선 자립준비청년을 대상으로 멘토링 사업을 시행하고 있는데, 추석 명절을 맞아 멘토와 멘티가 한데 모여 친목을 다질 수 있는 시간을 준비한 것이다. 지난 13일에는 경기 남부에서, 지난 14일에는 경기 북부에서 멘토와 멘티들이 각각 모여 송편과 전 등 명절 음식을 함께 만들어 먹고 윷놀이를 하며 즐기는 시간을 보냈다.

자립준비청년들은 외로움을 더 크게 느끼는 명절에 마련된 이런 자리가 소중하다고 입을 모았다. 박씨는 “시설을 퇴소한 뒤로는 동료 자립준비청년들을 일상에서 만날 기회가 별로 없었다”며 “그런데 이번 행사에서 만난 후배들에게 지원 제도나 퇴소 이후 생활 노하우를 전해줄 수 있어 매우 뜻깊었다”고 말했다.

이번 추석에 자립준비청년을 위해 색다른 기부를 한 기업들도 있었다. 자립준비청년들이 명절 기간 소외감을 느끼지 않고 이웃의 정을 경험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세무 플랫폼 ‘삼쩜삼’ 운영사 자비스앤빌런즈는 추석 기간 국내 비정부·비영리 단체(NGO) 희망조약돌과 자립준비청년을 위해 명절 식료품 키트를 전달했다. 후원 물품은 600만원 상당으로 수도권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자립준비청년들의 건강한 자립을 돕는다는 취지로 전달됐다. KC그룹은 경기 안성시 자립준비청년들에게 500만원 상당의 추석 선물 세트를 기탁했다.

신재희 최원준 한웅희 기자 j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