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씩씩한 민달팽이

입력 2024-09-25 00:35

비 갠 뒤 하늘은 쾌청했고 밤새 내린 빗줄기가 제법 굵었는지 졸졸 흐르던 천에 물이 불어났다. 이웃 주민들과 반려견이 드문드문 산책길을 오갔고 그러거나 말거나 달팽이들은 유유히 길을 가로질러 건너편 풀숲을 향했다. 저 속도라면 정오의 볕에 말라죽거나 신발 밑창에 깔려 압사당할 텐데.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눈에 띄는 달팽이 몇 마리를 집어 풀숲 그늘로 옮겨주었다. 녀석들은 콩알만한 집을 등에 얹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몸을 움직였다. 작디작은 생명이 부리는 여유에 샘이나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좋겠다, 너네는. 집을 타고났네.”

내 집 마련의 여정은 창문을 열면 축축한 콘크리트 벽이 손에 닿던 5평짜리 월세방에서 시작됐다. 전셋집을 얻고 나서는 매달 빠져나갈 돈이 줄고 저축할 돈이 늘어나는 즐거움을 맛봤고 알뜰히 모아서 해가 잘 드는 집으로, 살뜰히 모아서 방 한 칸이 더 있는 집으로 거처를 옮기며 살림을 다시 꾸렸다. 기껏해야 땅에 붙은 삶, 평온을 주는 자그마한 둥지이면 족했고 위안을 얻는 은신처라면 더없이 감사했으니 내 집 마련의 행보가 달팽이의 속도에 버금갔더라도 행복했다.

하지만 요 며칠은 마음이 어지러웠다. 세상이 너무 빨라서 묵묵히 나아가고 있음에도 내가 뒷걸음질 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줄지어 선 건물 사이를 오가며 아버지를 이어 나고 자란 한옥, 아름드리 감나무가 감싸 안은 흙집, 너른 들녘과 겹겹의 능선을 떠올렸다. 그곳에 축적된 삶의 흔적, 계절이 입힌 대지의 색채, 싱그러운 작물들의 냄새가 선연하다. 구체적이고 감각적으로 남아 있는 집의 인상을 여전히 흠모하며 갈구하고 있지만 나의 깊은 감정이 가닿을 곳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시대가 정의하는 집의 근원이란 무엇일까. 삶의 세밀함으로부터 연결된 풍성한 이야기와 은은한 감동이 흐르는 둥지를 만들고 싶다. 그 언젠가를 꿈꾸며 다시 씩씩한 달팽이가 되어보려 한다.

함혜주 이리히 스튜디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