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에 참전한 뒤 미국 연방 하원의원을 8차례 지낸 폴 매클로스키는 2014년 2월 평양을 방문했다. 그의 방북 목적은 전쟁 중 자신과 맞서 싸운 소년병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매클로스키는 전쟁이 끝난 뒤 로스쿨을 거쳐 정계에 투신했지만 여느 참전 용사들처럼 평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시달렸다. 총검 돌격 중에 자신이 죽인 소년병들의 얼굴이 떠오를 때면 특히 고통이 심했다.
매클로스키는 자신과 같은 전투 현장에서 살아남은 또 다른 소년병을 64년이 지나서야 평양에서 만났다. 소년병은 북한군 3성 장군으로 예편한 뒤 전쟁기념관 안내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서로 알아보지 못하고 어색해하던 두 사람은 전투 현장의 지형지물을 떠올리며 부상 경험을 털어놓고서야 손을 맞잡았다. 매클로스키의 방북을 주선한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미국 대사는 회고록 ‘역사의 파편들’에서 “가장 훌륭한 외교였다”고 자평했다.
그레그 대사는 2009년 김정일의 후계자로 내정된 아들 김정은을 미국으로 초청하자고 조 바이든 당시 미 부통령에게 건의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는 미국이 북한 지도부를 악마화하고 대화를 거부한 것은 ‘미 정보국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된 실패’라고 비판했다. 그레그 대사는 ‘무지가 만든 간극을 채우는 건 편견이며, 악선전과 선동정치로 적대감이 커질 뿐’이라며 북한의 악마화를 경계했다.
그레그 대사가 떠오른 것은 의사들의 ‘의사 악마화’ 주장 때문이다. 의사가 부족해서 의대 정원을 늘리자는 정책에 찬성하는 여론은 높지만 ‘정부가 의사를 악마화한다’는 것은 괴담이거나 선동에 가깝다. 의사들이 스스로 굴레 씌운 거짓 프레임일 뿐이다. 그 프레임이 만든 간극에 또 다른 편견이 들어서면 대화와 타협은 더 어려워진다. 의사들이 이런 프레임에 갇히지 않도록 누구보다 의사 출신 정치인들이 앞장서기 바란다. 22대 국회에는 의사 출신 8명을 포함 의료인 12명이 있다. 역대 최대 인원이다. 이들 중에 그레그 대사 같은 중재자가 나오기를 바란다.
전석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