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미래는 막막하기만 했다. 나 같은 실업계고 상과 졸업생은 은행에 입사해 사회인으로 첫발을 내디디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나는 아니었다. 그쪽에서 밥벌이를 하는 건 내 적성과 맞지 않다고 여겼다. 고민 끝에 각종 전자제품의 원리와 수리법 등을 배울 수 있는 학원에 다니기로 했다. 광주에 있는 ‘광주RTV학원’이었다.
어릴 때부터 전자제품에 관심이 많았다. 어린 시절 외갓집엔 소니(SONY)에서 만든 라디오가 있었는데 그 라디오를 갖고 노는 게 정말 행복했다.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면서 이런 쪽에 나의 달란트가 있음을 일찌감치 알았다.
광주RTV학원은 4년제 대학 전자공학과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을 1년간 속성으로 익힐 수 있는 곳이었다. 학원에 다니는 내내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오전 8시30분까지 학원에 가서 오후 4시까지 공부를 했다. 진공관 앰프나 라디오를 만들었다. 내 손을 거친 앰프나 라디오가 제대로 작동할 땐 엄청난 희열을 느꼈다.
그때를 생각하면 항상 고생만 하시던 어머니가 떠오른다. 어머니는 옷가게를 하던 외삼촌한테서 의류를 넘겨받아 이웃들에게 팔았다. 칼바람이 부는 추운 겨울에도, 푹푹 찌는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에도 어머니는 무거운 보따리를 짊어지고 집을 나서곤 했다. 큰아들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교육을 시키겠다는 것이 어머니의 신념이었다.
학원에서 1년간 공부한 뒤 비슷한 커리큘럼을 운영하는 학원에서 교사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금동시장에서 옷가게를 하던 외삼촌한테서 연락이 왔다. 사업을 같이 해보자는 제안이었다. 사업 아이템은 전자제품 수리점. 학원에서 갈고 닦은 내 실력 덕분에 가게는 금세 자리를 잡았다. 어떤 제품이든 깔끔하게 수리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손님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광주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도 소문을 듣고 가게를 찾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즈음 나는 그야말로 잘나가는 엔지니어였다. 학교에 음향 시설을 설치하는 일까지 했다. 하지만 이 일도 오래 할 순 없었다. 국방의 의무를 져야 했다. 혈압이 높았던 탓에 현역이 아닌 방위로 군 생활을 했다. 그리고 병역 의무를 마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내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광주 광산구 지산동에 전자제품 수리점을 열었다. 사업 비용은 아버지가 소를 팔아 번 돈에 외삼촌이 지인에게 보증을 서서 준비한 돈을 보태 마련할 수 있었다. 가게는 장사가 잘됐다. 그 무렵 우리나라엔 흑백 TV 보급률이 치솟고 있었다. TV를 수리해주거나 서울 도매상에서 TV를 구입한 뒤 그걸 되팔아 돈을 벌었다. 결국 외삼촌한테 빌린 돈을 개업 8개월 만에 갚을 수 있었다.
그 시절 내가 일군 작은 성공 스토리는 하나님께서 내게 준 달란트 덕분이다. 당시 나는 내 실력을 믿었기에 더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다. 가게를 차리고 1년쯤 흘렀을 때 또 다른 도전에 나서기로 했다. 광주의 한복판인 금남로에 가게를 열기로 했다. 돌아보면 정말 열심히 살았던 시기였다. 진짜 재밌었던 시절이었다.
정리=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