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인식 바꾸고 전문 상담까지… 자살유족지원센터 필요

입력 2024-09-19 03:08
자살유족들이 용기를 내어 ‘관련법 개정’ ‘자살유족지원센터 설립’ 필요성을 우리 사회에 제시하면서 인식 전환과 실효성 있는 지원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사진은 자살 방지를 위한 서울 마포대교 난간 글귀. 기독교자살예방센터 제공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자살률 1위, 하루 평균 38명(2023년 자살 사망자 1만3770명 기준)의 자살 사망자 발생. 우리 사회가 수년째 마주하고 있는 위기 상황의 단면이다. 회복을 위한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2015년 메르스(MERS, 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당시 누적 사망자수는 38명이었다. 전염병으로 38명이 희생된 일엔 요동쳤던 사회가 매일 38명씩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자살 문제’라는 사회적 질병을 앓았던 다른 사회는 어떻게 건강성을 되찾을 수 있었을까. 핵심은 문제 당사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연대를 지원하며,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 개선을 위해 지속적 노력을 투입했다는 것이다. ‘워크 투 세이프 라이프’는 자살 유족, 그들의 울타리가 돼 주며 우리 사회의 자살 문제에 대한 인식 변화를 추구해 온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유족, 가뒀던 목소리를 꺼내다

1981년 8월 23일과 2011년 6월 8일. 누군가에게는 그저 1년 365일 중 하루로 지나쳐버릴 그 날을 두 사람은 가슴에 인두로 새긴 듯 기억하고 있었다. 전문 심리상담사로 활동 중인 이들의 또 다른 교집합은 가족을 잃은 자살 유족이자, 같은 아픔을 나누기 위해 운영되는 자조모임 커뮤니티 ‘미고사(미안하다 고맙다 사랑한다)’의 운영진이란 점이다. 지난 10일 이들을 서울 중구에 자리잡은 미고사 모임 장소에서 만났다.

“대학 1학년 때 어머니를 잃었죠. 20년 넘게 그 이야길 꺼내지 못했고 지속적 애도 장애를 겪으며 우울증을 달고 살았어요. 상담을 배우게 되면서 비로소 스스로도 애도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강명수, 62) “전 아버지를 떠나보냈어요. 교회에 다니다보니 열심히 기도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1년이 지나도 변화가 없더군요. 나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싶어 자조모임을 찾았던 게 회복의 첫 걸음이었지요.”(심소영, 45)

이웃나라 일본은 2000년대 초반 OECD 자살률 1,2위를 기록하며 몸살을 앓았다. 국가 차원의 과감한 인프라 구축과 예산 투입으로 자살률 감소를 이끌어냈다. 그 중심에 자살 유족들이 있었다. 자신들의 아픔을 진솔하게 담아낸 책 ‘자살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2002)를 출간하고 연대를 이어가며 총리를 만나 “사회가 자살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이 같은 노력이 자살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라는 인식 전환을 이끌어냈다. 정부 지자체 시민단체 의료진 등 다양한 주체가 힘을 모아 2006년 자살대책기본법을 제정하면서 자살 종합대책이 사회 전반에 실효성 있게 뿌리내리는 기반이 됐다. 일본이 10년여 만에 자살 사망자 수를 30% 넘게 감소시킨 과정이다.

용기, 인식 전환의 마중물

국내에서도 최근 1~2년 사이 자살 유족들이 연대하며 표출되기 시작한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이들이 용기 내 꺼낸 이야기가 대중의 인식을 바꾸는 마중물이 됐고, 이를 토대로 법 개정, 입법 청원, 지원 서비스 보완책 등 실질적인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심씨는 “6년째 자살예방 강사로 활동하고 있는데 초창기엔 나를 연민의 대상으로 보기도 하고 ‘자살’을 자신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로 치부하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최근엔 자신의 고민과 우울함을 나눌 수 있는 의미있는 시간이었다는 반응이 줄을 잇는다”고 설명했다.

자살유족들이 지난 7월 부산 수영구의 한 복합문화공간에서 진행된 자살 유가족 인식 개선을 위한 지역 순회 포럼에서 ‘자살유족지원센터’ 설립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모습. 오른쪽부터 조동연 심소영 강명수 유족, 김혜민 한국자살예방협회 홍보위원장. 기독교자살예방센터 제공

라이프호프 기독교자살예방센터(대표 조성돈)를 중심으로 이어온 자살 유족과 함께 하는 공개 모임도 늘고 있다. 지난해 3차례 진행됐던 순회 포럼은 올해 서울 수도권을 비롯해 대전과 전북 전주, 부산에서 ‘자살, 말할 수 있는 죽음’을 주제로 5차례 진행됐다.

실무를 맡은 김주선 사무국장은 “주변 지인의 요청으로 마지못해 포럼에 동행한 참가자들 중에 돌아갈 땐 ‘그동안 내가 나쁜 사람이었다. 자살에 대한 편견이 깨졌다’며 눈물 흘리며 나서는 이들이 상당수”라고 전했다. 이어 “공개 모임 이후 포럼이 열린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유족 자조모임이 생기고 활동을 시작하는 모습도 고무적”이라고 덧붙였다.

자살유족지원센터가 필요하다


사회적 대책의 기반을 마련하고 실질적 지원의 물꼬를 트게 하는 비영리 민간단체(NPO)의 필요성도 부각되고 있다. 강씨는 “일본의 경우 라이프링크(대표 시미즈 야스유키)라는 단체가 자살 대책의 연결고리 역할을 표방하며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서명 운동과 함께 예산이 적재적소에 집행되도록 했다”며 “설립을 추진 중인 자살유족지원센터가 그 역할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안전생활실천시민연합(공동대표 강호인 외), 라이프호프, 미고사가 협력해 ‘자살예방법 및 관련법 개정’ 운동과 자살유족지원센터 설립을 위한 서명 운동을 펼치고 있다. 국가적 차원의 자살 예방 노력이 효과를 거두려면 지역 사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고, 이를 위해 자살예방에 필요한 조직과 인력, 재정이 유족 등 실제 수요자에게 적절히 공급돼야 한다는 게 핵심이다.

“실제로 자살 사건이 발생하고 경찰 측이 유족 정보를 접수하면 권역별 자살예방센터와 연결돼 유족이 있는 경찰서나 장례식장으로 찾아가는 원스톱 지원서비스로 도움을 주게 됩니다. 문제는 긴급 심리 상담, 경제적 지원, 법률 및 세무 지원 등 상황에 따라 다양한 도움이 필요한데 재정과 인력이 부족해 지역마다 서비스의 편차도 크고 충분한 일상의 회복으로 이어지기 어렵다는 겁니다.”(심소영)

조성돈 대표는 “자살유족지원센터가 세워지면 원스톱 지원서비스의 질적 향상이 가능하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유족이 처한 상황을 다각적으로 검토해 긴급 치료와 전문 상담이 필요한 영역은 자살예방센터가, 돌봄 지원·법률 및 세무 서비스·자조모임 연결과 동료지원활동 영역은 유족지원센터가 역할을 나눠 진행하면 보다 촘촘한 회복 안전망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유족으로서 상담사이자 손해사정보조인으로 활동 중인 조동연(49) 그린손해사정 사회공헌팀장은 “상황적 특성 상 자살 유족들은 극한의 당혹감을 느끼고 충분한 애도 시간을 가질 겨를도 없다보니 고인의 사망신고 과정에서 자산, 부채 등에 대한 처리를 할 때 곤란을 겪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그는 “특히 고인의 채무액이 유족의 자산을 상회할 때 이에 대해 과도한 책임을 지지 않도록 하는 ‘한정 승인’ 절차를 활용하면 유족 대표만 신고를 해도 되는데 ‘상속 포기’를 신청하는 우를 범하는 경우가 많다”며 “자살유족지원센터를 통해 상담사가 현실적인 부분까지 안내해 준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제언했다.

자살예방 교육강사 확대 절실

자살에 대한 인식 개선의 일환으로 국내에선 자살예방법 시행령을 통해 지난 7월부터 지자체, 초중고등학교, 사회복지시설 등을 대상으로 연 1회 자살 예방 교육이 의무화됐다. 김 사무국장은 “각 기관의 운영을 책임지는 관리자에게 ‘자살 예방 교육’이 필수적이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는 조치라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교육의 실효성에 있어서는 아쉬움을 전했다.

그는 “자살 고위험군으로 분류되는 학교 밖 청소년이나 그룹홈 거주 청소년 등이 의무교육 대상에서 제외됐고 온라인 시청각 교육이 허용되는 등 실질적인 교육 효과가 줄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자살예방 의무 교육 대상과 교육 전담 강사의 폭이 확대돼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양두석 안실련 자살예방센터장은 “생명에 대한 바른 인식을 심어줘야 하는 미취학 아동, 경쟁 심화에 따른 우울증을 호소하는 대학생 그룹 또한 의무교육 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밝혔다. 또 “일선에서 교육을 진행할 수 있는 강사의 기준이 과도하게 높다”며 “간호사 심리사 사회복지사 등 일정 자격을 갖춘 전문가는 한정적인데 현재 상황에선 강사의 허들을 낮춰 일정 교육을 이수한 준전문가들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안이 바람직하다”고 제안했다.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