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상림공원, 천년의 숲에서 거행되는 밤의 여왕 대관식

입력 2024-09-12 00:45 수정 2024-10-08 16:35
경남 함양군 상림공원 연꽃단지 빅토리아 수련이 거대한 잎 가운데에서 보라색 왕관 모양을 이루며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하고 있다.

경남 함양군은 북쪽에 덕유산을, 남쪽에 지리산을 품고 있는 고장이다. 그 중간 함양읍 대덕리에 상림공원이 자리한다. 타지에 나가 사는 함양 사람들에게 고향의 가장 그리운 장소를 꼽으라고 하면 열에 여덟이 꼽는 곳이다. 함양 8경 중 제1경에 올라 있다.

함양상림공원은 함양읍 중심부를 흐르는 위천(渭川)가를 따라 조림한 면적 20만5842㎡ 규모의 호안림(護岸林·제방 보호를 위한 숲)으로, 천연기념물 제154호이다. 통일 신라 진성여왕 때인 9세기 말 무렵 문장가로 유명한 고운 최치원 선생이 함양 태수로 있을 때 함양 시내의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조성됐다고 전해지는 ‘천년의 숲’이다.

상림은 봄의 신록, 여름의 녹음, 가을의 단풍, 겨울의 설경 등 사계절 각기 다른 풍경을 자랑한다. 요즘 상림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곳이 초록 상림과 오묘한 조화를 이루는 연꽃단지다. 상림공원과 연계해 2만 여평의 부지에 열대수련원, 수생식물원, 백련지, 홍련지 등 300여종의 연꽃이 자란다.

개화 첫날 새하얀 자태를 자랑하는 빅토리아 수련.

이 가운데 하이라이트는 여러해살이 수생식물 ‘빅토리아 수련’이다. 1801년 아마존강 유역에서 처음 발견됐다. 이후 1837년 영국 식물학자인 존 린들리는 그 해 즉위한 영국 빅토리아 여왕을 기념해 이 신비한 식물에 라틴어 학명 중 속명에 ‘빅토리아(Victoria)’를 붙였다.

빅토리아는 ‘큰가시연’으로도 불린다. 세상에서 가장 큰 홑잎(단엽)을 가졌다. 자생지인 열대 지방에서는 잎 한 장의 너비가 3m를 넘고, 잎자루의 길이도 최대 8m에 이른다고 한다. 잎끝이 쟁반 테두리처럼 올라온 특이한 모양은 빅토리아 수련만의 특징이다. 넓은 잎의 바닥 면에는 중앙에서 가장자리로 뻗는 단단한 잎맥과 푹신한 공기층이 있어 어린아이가 올라가도 찢어지지 않을 정도로 견고하다. 잎 뒷면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촘촘히 박혀 초식성 물고기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한다.

꽃의 개화와 수분 과정도 이채롭다. 잠잘 수(睡), 연꽃 연(蓮)을 쓰는 이름답게 수련은 보통 낮에 꽃을 피우고 저녁에 봉오리를 오므리지만, 빅토리아 수련은 해가 진 밤에 꽃을 피운 뒤 낮에는 꽃잎을 닫는 야간 개화종이다. 개화 첫날 암술이 발달한 꽃은 새하얀 자태를 자랑한다. 꽃을 수분하는 딱정벌레를 끌어들이기 위해 특유의 진한 파인애플 향을 풍긴다. 다른 수련의 꽃가루가 묻은 딱정벌레가 찾아와 수분에 성공한 꽃은 보라색으로 변하며 꽃잎을 열고 수술을 내보인다. 활짝 핀 꽃은 화려한 여왕의 왕관을 닮았다. ‘여왕의 대관식’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이후 서서히 가라앉으며 짧은 생을 마감한다.

늦더위가 한창인 요즘 상림은 시원함을 안겨준다. 숲속 오솔길은 연인들과 가족들 간에 사랑도 나누고 가슴속 깊은 대화도 나누는 사랑의 숲길이다. 120여 종의 낙엽활엽수가 1.6㎞ 둑을 따라 조성돼 있다. 요즘 전국적으로 붐을 일으키고 있는 맨발 산책로가 1.2㎞ 조성돼 있다.

상림에는 함화루(咸化樓), 사운정(思雲亭) 등 아름다운 정자와 만세기념비, 척화비, 역대군수 현감선정비석과 역사인물공원 등 다양한 볼거리도 산재해 있다.

함양 읍성의 남문인 함화루.

함화루는 조선시대 함양 읍성의 남문이다. 멀리 지리산이 보인다’는 뜻으로 망악루라 했으나 일제강점기에 도시계획이라는 명목으로 총독부에서 강제로 철거하려 하자 1932년 함양고적보존회 대표 노덕영이 사재를 들여 현재 위치로 옮기면서 함화루로 고쳤다고 알려져 있다.

사운정은 경남 유림과 정3품 박정규, 김득창이 고운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1906년(고종 46년) 건립했다. 처음에는 모현정이라 불렀으나, 후에 고운 선생을 추모한다는 뜻에서 사운정으로 바꿨다.

함양 관련 인물들로 조성된 역사인물공원.

상림 한편에는 함양 출신이거나 함양을 거쳐 간 인물들로 역사인물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함양의 선비 정신을 1100여 년 동안 굳건하게 지켜온 고운 최치원, 성리학의 대가 정여창, 김종직, 실학자 박지원, 의병대장 문태서 등 함양을 빛낸 인물 11명의 상반신상이, 그 옆엔 함양을 다스렸던 수령들의 선정비가 줄지어 있다.

위천 옆 길게 뻗은 상림을 따라 꽃정원이 이어지고 있다.

숲과 나란히 이어지는 꽃정원도 환상적이다. 노란색 코레우리(솔잎금계국), 보라색 버들마편초(숙근버베나), 족두리꽃(풍접초), 숙근사루비아(빅토리아 블루), 안젤로니아 등 다양한 색을 자랑하는 꽃들의 향기가 가득하다.

여행메모
상림 인근 오곡밥·연밥 특별 먹거리
10월 3~9일 ‘제19회 함양산삼축제’

함양 상림에 가려면 광주대구고속도로 서함양나들목이나 함양나들목을 이용하면 편하다. 승용차가 없으면 어디서든 함양 행 버스를 이용, 터미널에서 내려 10여분만 걸으면 닿는다. 입장료·주차료 모두 무료다. 상림 인근 식당들은 정갈한 반찬으로 돌솥밥, 오곡밥, 연밥 등 특별한 메뉴를 내놓는다.

상림공원 일대에서 다음 달 3~9일 ‘함양애(愛) 반하고, 산삼애(愛) 빠지다’라는 주제로 ‘제19회 함양산삼축제’가 개최된다. 함양산삼축제의 스테디셀러인 ‘황금 산삼을 찾아라’ ‘산삼 캐기 체험’ ‘산삼 경매’뿐 아니라 ‘함양국악한마당’ ‘열린음악회’, 축제 기념 이벤트 등이 진행될 예정이다.

해발 500m 이상의 게르마늄 토양에서 자란 함양산삼은 치밀하고 단단한 조직, 높은 사포닌 함량 등 매우 뛰어난 품질로 명품산삼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지안재 가까운 오봉산과 삼봉산 사이에 시간의 숙성으로 가꾼 체험형 농장(와이너리)이자 정원인 ‘하미앙와인밸리’가 있다. 카페와 레스토랑을 갖춘 주황색 기와의 유럽풍 건물 등을 지닌 경남도 민간정원이다. 와인족욕과 산머루비누 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





함양=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