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NO’ 캠페인 20년
교계가 생명보듬주일로 지정한 지난 8일 경기도 안양 평촌중앙공원에서는 생명 존중을 위한 시민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라이프호프 기독교자살예방센터(대표 조성돈 교수)와 안양감리교회(임용택 목사)가 8년째 함께 열고 있는 ‘사람사랑 생명사랑 걷기캠페인’이다.
최고 기온 31도를 웃도는 찜통 날씨에도 불구하고 공원에는 캠페인에 동참한 교인과 시민들로 북적였다. 다채로운 활동으로 구성된 23개 부스엔 어린 자녀와 부모부터 진지하게 자살 예방에 대해 설명을 듣는 노인 등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대한민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9년간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정부와 지자체, 시민단체 등의 노력은 이어졌지만 숫자가 보여주는 현실은 냉혹하기만 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생명 존중 문화를 전파하고 자살 예방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쓰고 있는 교회와 교계 단체를 조명한다.
생명·사람 살리는 발걸음
이날 안양감리교회 1층 정문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시선을 붙잡는 건 치수별로 가지런히 놓인 흰색 걷기캠페인 티셔츠와 그걸 나눠주는 봉사자들이었다. 성도들은 이런 광경이 익숙한 듯 자신의 치수를 얘기한 후 각자 티셔츠를 받아갔다. 교회는 이날을 ‘생명보듬주일’로 지켰다.
예배당에 들어서자 캠페인 티셔츠를 맞춰 입은 성가대원과 성도들이 곳곳에 보였다. 임용택 목사는 ‘살아야 할 이유’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교회 안에서 자살이 더이상 죄악시돼선 안된다”면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고 보듬을 수 있는 곳이 돼야 한다. 또 자살로 사랑하는 가족을 떠난 보낸 이를 위해 함께 가슴 아파하며 위로하고 기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권면했다. 성도들은 일제히 “아멘”이라고 화답했다. 그동안 한국교회에서 좀처럼 듣기 어려운 설교를 받아들이는 성도들의 반응이 인상적이었다.
안양감리교회 주보 한켠엔 ‘생명을 살리는 한 칸’이 마련됐다. ‘우울감 등 말하지 못할 고민이 있을 때 언제든 전화주세요’라는 문구와 함께 ‘자살예방 상담전화(109번)’ ‘희망의 전화(129번)’ ‘경기도정신건강복지센터’의 번호를 안내하고 있었다. ‘생명을 살리는 건강한 공동체를 추구한다’는 교회 표어와 딱 들어맞는 한 칸이었다.
임 목사가 자살이 가진 영향력을 실감하게 된 건 시골에서 목회했을 때다. 한 성도의 가족이 농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그는 “자살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절실하게 느꼈다”며 “가족에게 끼치는 부정적 영향이 상상 이상으로 컸다. 그때부터 생명을 살리는 목회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했다.
자살예방 교육 의무 수강
임 목사가 안양감리교회 담임목사로 부임 후 자살예방을 위한 목소리를 본격적으로 내기 시작했다. 이 교회의 생명 존중을 위한 발걸음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멈췄을 때도 교회와 성도들은 이 같은 행보를 멈추지 않았다. 각자의 자리에서 코스를 정해 걸은 후 인증 사진을 찍어 공유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봉사자로 참여한 조영희(55) 권사는 “높은 자살률은 과거부터 심각한 사회 문제였지만 팬데믹 이후 급증했다”며 “마음의 병으로 자신의 아픔을 털어놓지 못하는 이웃이 주변에 많다는 것을 깨닫는다. 걷기 캠페인을 통해 치유되고 희망을 되찾고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선물을 온전히 누리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교회는 중직자인 장로와 속장 등에게 라이프호프에서 진행하는 자살예방 강사 교육을 의무적으로 수강하도록 하고 있다. 또 우울감을 느끼는 성도를 기독교 전문상담기관에 연결해 상담받을 수 있도록 힘쓰고 있다. 임 목사는 “생명을 살리는 일은 영혼 구원만큼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생명 보듬이를 키우는 교회
경기도 부천 내동교회(천성환 목사)는 올해 창립 74주년을 맞아 지난 4월 지역 주민, 성도와 나흘 간의 집회를 잇달아 개최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50여명의 성도가 자살예방 강사 교육 자격증까지 땄다. 교회는 부천지역 자살 예방 거점으로 거듭나기 위해 지자체와 협력도 추진하고 있다.
천 목사는 “생명의 가치에 대해 가장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곳은 교회”라며 “한 영혼에 대한 소중함을 가르치고 교회와 교인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자살예방에 힘써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교회도 안정적이고 전문성을 가질 수 있는 공동체라는 인식을 사회에 심어줄 필요가 있다”면서 “교회가 현실을 직시하고 내부적으로 여건을 잘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서울 도림감리교회(장진원 목사)는 자살 유가족을 위한 교회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회는 이날 설교를 자살 유가족 성도가 간증하는 순서로 대체했다. 매월 둘째 주 토요일, 마지막 주 수요일엔 유가족과 예배를 드린다. 매년 상·하반기에 한 번 자살 유가족 추도예배를 드린다.
자살 유가족을 품자
오랫동안 숨어 지냈던 자살 유가족이 세상 밖으로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선 이들에겐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사회의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에 앞서 가족을 먼저 떠나보냈다는 죄책감과 자신을 향한 낙인에서 벗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헤쳐나가야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있다.
최근 시민단체 등을 통해 자살 유가족 센터 건립을 요구하는 주장이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 10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2대 국회 들어 발의된 관련 법안 건수는 이날 기준으로 총 3897건이다. 이 가운데 ‘자살예방 및 생명존중문화 조성을 위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관련 법안은 5건에 불과하다. 대한민국이 자살예방에 얼마나 무감각한지 보여주는 현주소다.
조성돈 교수는 “한국사회가 자살에 대해 쉬쉬하는 단계는 넘어서고 있는 것 같다”며 “자살에 대한 인식이 과거보다 상당히 바뀌었지만 여전히 자살 유가족을 위한 안전한 공간은 부족한 것이 현실”이라고 했다. 이어 “교회가 적극 나서서 자살예방 목소리를 내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면서 “성도들의 역할과 참여 의지가 제일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안양=글·사진 유경진 기자 yk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