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우리는 급변하는 위기의 시대 속에서 푯대를 찾고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요, 영원히 견고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우리를 세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위기의 시대를 지나며 숱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300여년을 승리한 믿음의 선조 모델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큰 확신과 위로, 힘이 될 것입니다. 이 시대가 바라보고 따라갈 믿음의 모델이 과연 있을까요.
본문은 요한계시록에서 신학적으로 가장 예민한 부분 중 한 곳입니다. 본문에 나온 어린 양과 함께 시온산에 있는 14만4000명에 대한 다양한 해석 때문입니다. 근래 주님의 교회를 가장 어지럽게 하는 신천지도 이 구절에서 기인된 어처구니없는 이단입니다. 새 노래를 부르기에 합당한 자들,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을 지킨 자들,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 이들을 누구로 정의해야 할까요.
먼저 14만4000은 상징적 숫자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또한 이들이 이스라엘이든 이방이든 이것은 구름 같이 허다한(히 12:1) 승리하는 믿음의 증인들, 순교자들의 무리입니다. 이들은 어떤 상황 속에서든 승리한 이들입니다. 어떤 흔들림 속에서도 무너지지 아니한 자들로 끝까지 진리의 길을 살아낸 자들입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참 승리의 모델인 모라비안 공동체를 콜링합니다. 이들은 체코 종교개혁자 얀 후스(1372~1415)에서 보헤미아 목사 코메니우스(1592~1670)를 지나 헤른후트 공동체 설립자인 독일의 루드비히 진젠도르프(1700~1760)에 이르러 위대한 영광의 꽃을 피운 이들입니다. 18세 경건주의자들의 뿌리였고 어린양이 인도하는 대로 어디든지 따랐던 순교자들, 개혁자들, 개척자들로 열방에 길을 만들었던 이들입니다.
그러므로 21세기 뉴모라비안은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첫째,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한 자들입니다. 둘째, 어린 양이 어디든지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셋째, 그 입에 거짓이 없는 자들입니다.
21세기 뉴모라비안의 삶은 요한계시록 17~18장에 나온 사단의 신부로 짝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지 않으며 주님의 신부로 주님만 사랑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린 양의 길을 걸으며 주의 십자가 지고 가신 길을 즐거이 따라가는, 오직 정직을 말하며 찬송이 있는 자들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만사가 형통해야 신앙생활이 성공한 것으로 오해합니다. 쾌락과 성공, 이생의 자랑과 헛된 영광을 누림이 승리인 줄로 착각합니다. 이것은 큰 오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 양의 길은 십자가를 지시고 승리하신 길입니다. 자신을 죽여 수많은 인류를 구원한 길입니다. 이것이 어린 양을 따르는 군대의 능력입니다. 이것이 모라비안들의 수 세기 승리의 길입니다. 이것이 14만4000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남을 죽여서 이기는 마치 중세 십자군이 아니라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세상을 이기신 어린양의 이김을 따르는 어린양의 군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고 있으며 누구를 쫓고 있습니까. 주님은 십자가를 앞세워 억압과 폭력으로 이기는 중세 십자군이 아닌, 자신을 십자가에 죽여 이기는 어린양의 군대를 소집하십니다. 21세기 뉴모라비안, 21세기 14만4000, 어린 양이 어디든지 인도하는대로 따라가는 어린 양의 군대를 소집하십니다.
박호종 목사(더크로스처치)
◇박호종 목사는 기독교한국침례회 소속 더크로스처치를 섬기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모라비안 신앙 운동을 전개하며 신앙 회복과 기도 운동을 통한 다음세대를 일으키는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