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필라델피 회랑

입력 2024-09-06 00:40

제1차 세계대전 후, 패전국 독일은 베르사유조약에 따라 폴란드에 서프로이센 일부가 포함된 길이 400㎞, 너비 128㎞의 지역을 할양했다. 바로 폴란드 회랑이다. 승전국들이 내륙국 폴란드에 바닷길을 제공하기 위함인데 독일은 조용히 영토 수복의 칼을 갈았다. 아돌프 히틀러가 1938년 이 회랑의 도로·철도 지배권을 요구하다 폴란드가 거부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침공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이었다.

회랑(Corridor)은 폭이 좁고 긴 통로란 뜻이나 지정학 차원에선 한 국가에서 타국으로 나가는 좁은 지역을 일컫는다. 국가 사이의 진출로여서 영토 분쟁과 긴장의 대상이 되기 일쑤고 진영 간 완충지대 혹은 요충지 역할을 하곤 한다.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와 러시아 간 긴장이 고조된 곳 중 하나가 수바우키 회랑이다. 수바우키 회랑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사이 약 65㎞에 이르는 육상 통로로서 러시아 동맹국 벨라루스와 러시아의 역외영토 칼리닌그라드를 연결한다. 러시아와 벨라루스가 이곳에서 군사훈련을 하자 폴란드 등 나토 동맹국들도 맞대응했다.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재장악한 2021년 이후 중국과 아프간 국경 지대에 놓인 와칸 회랑은 미국과 중국 간 새로운 패권 전선으로 부상했다.

79년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평화협정을 통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와 이집트 사이 국경을 잇는 14㎞ 지역을 이·팔 분쟁의 완충지대로 조성했다. 2005년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철수할 때 자국군 작전 암호명을 따 이곳을 ‘필라델피 회랑’으로 명명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일어난 뒤 이스라엘군이 하마스의 무기 밀수를 막기 위해 이곳에 진입했다.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이 협정 위반이라 반발하고 있다. 미 언론이 5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필라델피 회랑 철군 거부로 휴전 협상이 물거품이 될 위기에 놓였다고 전했다. 벌써 양측 사상자가 5만여명이다. 협정 초심으로 돌아가면 평화가 손에 잡힐 듯한데 그게 그리 어려운 모양이다.

고세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