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공연을 보기로 한 날이었다. 늦장을 피우다 부랴부랴 나섰는데, 지하철로 환승한 순간 아뿔싸! 휴대전화를 두고 왔다는 걸 알았다. 되돌아가면 필시 공연 시간을 못 맞출 것이다. 근방에 공중전화도 보이지 않았거니와, 동전도 없었다. 잠시 머뭇거리다, 지나가는 남자에게 슬쩍 말을 건넸다. “저기요.” 그 남자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경계심 어린 표정으로 나를 봤다. 혹시 도 닦으라고 말 거는 줄 알고 그런 걸까. 나는 최대한 인상 좋아 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핸드폰을 두고 와서요, 전화 한 통만….” 남자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를 휙 지나쳐 갔다. 좀 무안하고 억울했다. 세상 참 각박하네 어쩌네, 한탄할 겨를이 없었다.
때마침 맞은편에 파출소가 보였다. 부랴부랴 건널목을 건넜다. 도움을 요청할까 하다가, 파출소 유리문 앞에서 망설였다. 일도 바쁠 텐데, 괜히 성가시게 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잠시 주저하다가, 파출소 옆 과일 가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혹시, 전화 한 통만 빌려 쓸 수 있을까요?” 주인아저씨가 흔쾌히 가게 전화를 가리키며 쓰라고 했다. 친구와 통화를 마치고 나서야 걱정이 풀렸다. 신세를 졌으니, 과일이라도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상자에 ‘추희 자두’라고 적힌 게 보였다. “그거 가을 자두인데, 속은 달고 껍질은 새콤달콤해요.” 씻은 거니까 맛보라고 아저씨가 자두 한 알을 덤으로 주었다. 손에 쥐어 보니 여름 자두보다 크고, 탱탱했다. 인심도 후한 주인이었다.
가을 추(秋)에 기쁠 희(喜)라니. 이름도 참 곱네. 이런 이름을 붙인 사람은 시인일 것이다. 자두를 쥐어 본다. 약간 단단하고 탄력 있다. 아무리 세상이 삭막하게 변해간대도, 오늘의 기쁨은 주인아저씨가 건네준 자두 한 알이려니. 친구에게도 이 어여쁜 자두 이름을 알려주고 싶었다. 개찰구를 빠져나오니, 저만치서 친구가 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신미나 시인 겸 웹툰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