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에게 부모와 같은 비빌 언덕이 있었다면 지금보다 더 역량 있는 삶을 살지 않았을까.’
2018년 1월 ㈔크로스로드가 자립준비청년(보호종료아동)을 대상으로 시작한 ‘비빌 언덕 프로젝트’는 이 단체 대표인 정성진(69) 목사의 우연한 생각에서 비롯됐다. 이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자립준비청년의 비빌 언덕이 되자’는 비전으로 구체화됐다. 정 목사는 자신이 제시한 이 비전에 동의한 이들과 함께 자립준비청년의 든든한 비빌 언덕이 되고 있다.
반찬 배달, 상담, 긴급재정 지원, 명절 모임, 취업 연계 등 36명의 자립준비청년을 위한 ‘전방위 사역’으로 발전한 것이다. 우연한 생각은 음지에서 고통받는 자립준비청년에게 한 줄기 빛을 비추는 ‘나비효과’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동창 만남서 ‘비빌 언덕 프로젝트’ 착안
거룩한빛광성교회를 개척한 정 목사는 2019년 조기 은퇴를 선언하며 교계에 신선한 도전을 던진 인물이다. 은퇴 후 본격적으로 이 프로젝트를 전개하며 자립준비청년의 멘토이자 아버지로 헌신하며 제2의 인생을 맞고 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된 자립준비청년은 36명이나 된다. 크로스로드 는 교계에서 처음으로 자립준비청년 사역을 시작한 선한울타리(대표 최상규)와 함께 자립준비청년 멘토 사역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 경기도 고양 단체 사무실에서 정 목사를 만났다. 그는 “거룩한빛광성교회에서 은퇴하기 전인 2017년 초등학교 동창을 수십년 만에 우연히 만났고, 이를 통해 비빌 언덕 프로젝트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동창은 경상도 출신으로 한국전쟁 당시 피란길에 부모와 생이별한 전쟁고아였다. 이후 크리스천이 운영하는 한 보육원에 입소한 뒤 초등학교에서 줄곧 반장을 도맡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명문중학교에 입학한 소식까지 듣고 연락이 끊어졌는데 우연한 기회로 재회했다.
정 목사는 “명문대에 입학했을 거라는 제 생각과 다르게 친구는 보육원 퇴소 후 야간학교에 다니며 일했다고 한다. 그의 능력에 비하면 좀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밝혔다.
반찬 배달로 자연스럽게 ‘라포’ 형성
이 만남을 계기로 그는 설교 강단에서 자립준비청년에 대한 메시지를 전했다. 그의 예상과 달리 메시지에 감동받는 이들은 적었다. 정 목사는 “이 사역에 뜻을 가진 이들이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그와 연결된 이들은 파주보육원을 퇴소한 자립준비청년들이었다. 퇴소 후 가장 필요한 것에 관해 묻자 의외로 식사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비빌 언덕 프로젝트의 첫 사업은 반찬 배달이었다.
거룩한빛광성교회 긍휼봉사팀을 비롯해 단체 비빌언덕팀에 속한 10여명의 봉사자가 직접 반찬을 배달하며 자립준비청년들과 안면을 텄다. 어색한 관계는 횟수를 거듭할수록 친밀해졌다. 정 목사는 “반찬을 전달하기 위해 자립준비청년을 방문한 자리에서 이들의 고민과 생활 면면을 알게 되고 자연스럽게 소통하는 효과가 있었다”고 했다.
자립준비청년 일이라면 발벗고 나서
봉사자와 자립준비청년의 라포(친밀한 유대 관계)가 형성되자 자립준비청년을 위한 다양한 사업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단체는 퇴소 후 독립적으로 거주하는 주거공간에 필요한 가구를 비롯해 자립준비청년의 요청에 따라 운전면허 취득 등 교육비용도 지원한다. 구정·추석 모임, 가정의 달, 크리스마스 등 일 년에 주기적으로 만나는 모임도 있다.
정 목사는 “자녀가 부모에게 필요한 것을 스스럼없이 말하듯 자립준비청년들은 위급 상황이 있을 때마다 봉사자들을 찾는다”며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봉사자들의 헌신이 있고 1700여명에 이르는 단체 회원들이 함께하기에 재정적 부담 없이 섬길 수 있다”고 설명했다.
거룩한빛광성교회를 비롯해 거룩한빛광성교회가 분립개척한 교회들, 정 목사가 이사장으로 있는 해피월드복지재단 등에 일자리가 생기면 역량 있는 자립준비청년들이 지원할 수 있도록 주선하는 것도 단체의 역할이다.
자립준비청년의 진정한 자립은 어느 단계일까. 정 목사는 이 질문에 “온전한 가정을 꾸리는 데 있다. 단체가 멘토링해 온 자립준비청년 중 한 명이 직업군인과 결혼해 얼마 전 돌잔치도 했다”고 귀띔했다.
탈북 청년에도 관심 두길
정 목사는 자립준비청년이 겪는 것과 같은 구조적 어려움에 부딪히는 또 다른 그룹을 발견했다. 한국에서 생활하는 탈북민 청년들이다. 정 목사는 “탈북 과정에서 겪은 마음의 상처는 말할 것도 없고 어쩌면 이들은 자립준비청년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며 “그동안 자립준비청년을 도운 방법을 활용해 올해부터 9명의 탈북 청년을 돕고 있다”고 말했다.
자립준비청년과 ‘일촌맺기’ 교계 제안
정 목사는 자립준비청년을 위한 멘토 사역에 한국교회가 더욱 발 벗고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모 없는 어린 새가 살아남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보육원 퇴소 후 홀로서기에 나선 자립준비청년에게 누군가는 이들의 비빌 언덕이 돼줘야 합니다. 성경은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선대할 것을 명령합니다. 교회와 성도들이 자신의 아픔에만 매몰되지 않고 이웃의 아픔을 찾고 바라볼 때 우리 사회가 살 만한 세상으로 변화되지 않을까요.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한 교회가 자립준비청년이나 보육원 아이들과 매칭하는 ‘일촌맺기’ 운동을 전개하면 어떨까요.”
고양=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