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상담으로 24시간 대기… 위기에 처한 이들에 ‘응급실’ 돼줘

입력 2024-09-05 03:06
에스더 하 재단(이사장 하용화)이 지난해 6월 뉴욕 하크네시야교회(전광성 목사)에서 진행한 ‘정신 건강의 날’ 행사에서 참가자들이 체조를 하며 몸을 풀고 있다. 에스더 하 재단

“5년 전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어요. 슬픔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이듬해 또 하나의 충격이 찾아왔습니다. 건강하기만 했던 아들을 급성 대장암으로 떠나보내야 했어요. 거리를 걷다가도 온몸이 떨려 주저앉았고, 비어 있는 집으로 들어갈 때면 심장이 요동을 쳤지요.”

지난달 20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베이사이드 지역의 한 카페에서 만난 곽경숙(73)씨는 1977년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다. 산전수전을 겪어내며 나름의 안정적인 일상을 살아가던 시기에 큰 파고가 찾아왔다. 그는 “가장 힘들었던 건 주변에서 ‘저 사람이 주는 건 재수 없으니 받지 마’라는 얘길 들어야 했을 때였다”며 “용기 내어 회복으로 길을 내야할 시기에 오히려 잔뜩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고 회상했다.

자살 시도를 고민할 정도로 우울증이 극심해지던 어느 날 신문 한 편에서 본 ‘정신 건강 세미나’ 기사에 번쩍 눈이 뜨였다. 평소 라디오나 텔레비전 광고로 접할 때마다 ‘나하고는 관계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지나쳤던 정신 건강이 처음으로 자기 이야기처럼 다가왔다.

세미나 참석을 기점으로 유가족 자조모임에도 참석하게 되면서 곽씨의 삶은 점점 원래의 궤도를 찾았다. 그는 “모임에 가보니 ‘성실하던 남편과 아이비리그 대학 졸업을 앞둔 아들을 연이어 자살로 잃은 사람’ ‘사랑하는 딸의 죽음이 치료시기를 놓친 자신 때문이라고 자책하는 사람’ 등 나처럼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며 “내게 닥친 상황에만 매몰되던 것에서 크고 작은 아픔을 나누는 데 집중할 수 있었던 전환점”이라고 소개했다.

함께 만들어 가는 정신 건강 안전망

뉴욕엔 주 정부나 공공기관, 지역 사회와 협력하며 시민들의 정신 건강 안전망이 돼주는 민간단체들의 활동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에스더 하 재단(Esther Ha Foundation·이사장 하용화)도 그 중 하나다. 2014년 당시 21세였던 딸을 자살로 잃은 하용화 솔로몬보험 그룹 회장이 ‘나 같은 아픔을 겪는 부모가 없도록 하자’는 다짐과 함께 조의금 10만 달러를 마중물 삼아 딸의 이름을 걸고 출범한 기관이다.

뉴욕한인봉사센터(KCS·회장 김명미)가 지난해 5월 정신 건강 증진을 위해 KCS 커뮤니티센터 강당에서 개최한 ‘당신의 정신건강 안녕하세요’ 행사 참석자들 모습. KCS 제공

심리적 위기 상황에 놓인 이들을 위한 24시간 무료상담전화 ‘헬프 라인’, 다양한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부모 청소년 청년들을 위한 ‘서포트 그룹(주 1회)’, 정신건강 전문가를 초청해 1박 2일 동안 부정적 감정을 해소하고 집단 상담을 진행하는 ‘힐링 캠프(연 3~4회)’,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이 모여 서로를 보듬는 ‘유가족 자조모임(주 1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촘촘한 생명 그물망을 만들고 있다.

20일 현지 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현미숙 사무총장은 “정부의 적극적인 정책 시행, 재정 투입과 함께 시민들의 일상 최전선에서 접촉점이 돼주는 심리적 지원 활동이 이뤄진다면 위기 상황에 놓인 이들에게 큰 힘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정부지원 프로그램인 ‘정신건강 응급처치 과정’을 통해 400여명의 동료 지원가(peer supporter)들이 이웃의 생명을 지키는 ‘시민 히어로’로 활약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웃 위하는 시민=생명 다리

이날 오전 만난 전광성(54) 뉴욕 하크네시야교회 목사에게 월요일과 목요일은 평소보다 자신의 스마트폰을 유심히 들여다보게 되는 날이다. 3년째 매주 정해진 시간 동안 24시간 상담전화 ‘헬프 라인’의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 목사는 “2년 만에 봉사시간 500시간을 넘겼는데 별의별 상황 때문에 우울증, 공황장애 겪는 이들이 많다”며 “전화를 받다보면 죽고 싶다고 얘기하지만 사실은 죽을 만큼 살고 싶은 마음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는 심리적 위기 상황에 처한 이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회복을 돕는 프로그램을 안내하거나 위급 상황엔 911로 연결하는 ‘생명 다리’ 역할을 하고 있었다. 현 사무총장은 “52명의 봉사자가 24시간 책임지고 있다”며 “상담할 땐 자신의 직업이나 출신을 밝히지 않지만 전직 간호사, 상담학 전공자는 물론 평소 상담이 일상화된 목회자들이 훌륭하게 역할을 소화해내고 있다”고 전했다.

나종호 예일대 정신의학과 교수는 “물리적인 부상을 입은 위급 상황에 응급실을 찾듯이 심리적인 상처를 입은 이들에게 이 같은 상담과 대화가 ‘정신과 응급실’ 역할을 하는 셈”이라며 “정신적 위기 상황에 단 한 사람이라도 곁에서 이야기를 나눠주는 게 물론 중요하지만 사회 네트워크가 공동체로서 더 원활하게 작동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지역 기관, 정부와의 협력이 곧 시너지

미동북부 최대 한인단체로 1973년 설립 이후 사회봉사, 노인복지, 교육, 정신건강 센터 등 활발하게 활동 중인 뉴욕 한인봉사센터(KCS·회장 김명미)도 생명의 사각지대를 지키고 있다. 특히 정신건강 클리닉은 뉴욕주가 면허를 주고 인증하는 기관으로 지역 사회로부터 신뢰를 얻고 있다.

윤윤아 클리닉 디렉터는 “정신 건강 회복을 위해서는 세대, 문화, 언어 등 내담자가 처한 상황에 따른 전문적이고 복합적인 치료 과정이 필요하다”며 “학교나 직장, 가정, 병원 사회복지사 등 다양한 주체와 유기적으로 협력을 해야 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김명미 회장은 “최근엔 뉴욕주로부터 정신질환 치료 지정 기관으로 선정돼 20만 달러의 예산을 지원받게 됐다”며 “지역 내 사회문화적 이해도가 높은 기관들이 정부와 긴밀하게 협력할 때 보다 효과적이고 지속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언했다.

위기 상황 연속적으로 돕는 시스템

미국 사회에는 심리적 위기 상황에 처한 이들을 연속적으로 돕는 시스템이 가동되고 있다. 여기에는 24시간 운영되는 ‘위기 상담 전화’, 위기에 처한 개인을 찾아가 돕는 ‘위기 대응팀’, 24시간 이내로 머물며 전문 상담을 지원받을 수 있는 ‘위기 안정 쉼터’가 적재적소에 준비돼 있다.

손해인 뉴욕시 아동정신병원 임상사회복지사는 “실제로 애리조나 남부 지역에서 운영 중인 시스템을 분석해 본 결과 위기 상담 전화를 통해 위기 상황의 80%가 해결됐고, 전화로 해결되지 않아 위기 대응팀이 출동한 경우에는 현장에서 위기 상황의 71%가 해결됐으며 위기안정시설에 입소한 경우도 68%가 지역사회로 복귀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에서도 지난 1월부터 자살예방 상담 서비스를 ‘109’로 통합 운영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실효성을 위해 무엇을 보완해야 하는 지 다양한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자살예방과 정신건강 정책의 연속성을 위한 조언도 했다. 손 복지사는 “뉴욕주의 정신보건국 장관은 정신과 전문의인 앤 설리반 박사가 2014년 처음 임명된 이후 현재까지 임무를 맡고 있고, 동료 지원 서비스 책임자는 17세부터 정신과 치료를 받기 시작한 당사자가 해당 분야를 전담하고 있다”며 “결국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바탕으로 정책 입안과 집행, 시민 사회의 협력이 하나로 모일 때 사회가 건강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뉴욕 브롱스 레바논병원의 심리 상담가 이수일 박사는 “한인사회와 한국사회엔 여전히 심리 상담을 받으러 가는 게 알려지는 것을 치부가 드러나는 것으로 여기고 우울증이나 정신 질환을 ‘먹고 살 만하니까 걸리는 병’으로 폄훼하는 분위기가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미국의 젊은 세대들 사이에선 퇴근 후 심리 상담 받으러 가는 것을 짐(gym)에 가서 운동하는 것처럼 자신을 잘 관리하는 매력적인 활동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자리잡고 있다”며 “정책적 노력과 더불어 대중들의 인식 변화 또한 정신이 건강한 사회를 위한 필수 요건”이라고 말했다.

뉴욕=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