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선 기자의 교회건축 기행] <17> 경북 봉화척곡교회

입력 2024-09-07 03:03 수정 2024-09-07 03:03
봉화척곡교회 전경. 1907년 개척한 교회는 1909년 예배당을 건축했다. 1936년 중수해 1990년 붉은 벽돌로 증축했다가 2015년 본래의 모습대로 복원했다. 건축 당시 한옥교회는 대개 두 개의 평면을 연결해 지붕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 교회는 두 개의 평면 외에 평면이 연결된 부위의 양쪽에 새로운 평면을 붙여 만든 반박공지붕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는 당시 새로운 외형이었다.

우리나라 한옥교회는 3단계를 거쳐 변천했다. 1단계는 19세기 말로 건물의 구조 재료 외관이 한옥의 전통을 그대로 따랐다. 종탑과 십자가가 부분적으로 세워졌다. 2단계는 1900년대 전후다. 기와지붕 등 외관은 변하지 않고 건축 재료로 벽돌을 사용했다. 재료가 단단해지면서 건물과 종탑이 커졌다. 3단계는 1920~30년대로 서양 건축 양식이 적극 반영됐다. 기와지붕을 여전히 사용했지만 건물의 구조, 벽체가 바뀌었다.

이런 변천사로 볼 때 경북 봉화척곡교회(박영순 목사)는 20여년 앞선 건축물로 꼽힌다. 교회는 1909년에 지어졌지만 1920~1930년대의 특징을 보여준다. 초석 목조기둥 회벽 처마 서까래 등은 전통 양식이지만 기와지붕의 한 형태인 반박공지붕, 삼각형 모양으로 배열된 구조인 트러스 사용, 창호의 구성은 근대 양식을 따랐다. 한국 전통 건축과 근대 건축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하늘에서 봉화척곡교회의 정방형 건물이 명확하게 보인다.

첫 번째 ‘ㅁ’자형 한옥교회

또 건물 평면을 횡이 아닌 종으로 길게 했다. 깊은 공간감을 느끼도록 한 것인데 보통 서양의 성당이 그런 식이다. 당시 한옥교회가 대부분 ‘ㄱ’자형 또는 ‘ㅡ’자형인 상황에서 첫 번째 ‘ㅁ’자형 한옥교회로 봉화척곡교회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다.

지난달 27일 봉화척곡교회를 찾았다. 내비게이션을 따라 도착한 곳엔 태극기가 그려진 바람개비들이 줄지어 꽂혀 있었다. 그 뒤로 기와지붕 예배당과 초가가 보였다. 예배당은 ㅁ자, 정사각형 모양이었다. 기둥과 기둥 사이의 거리를 재는 단위로 ‘칸’을 사용하는데 정면 3칸, 측면 3칸이었고 단상 쪽에 정면 1칸 측면 1칸의 공간이 더 있었다.

교회 예배당 실내.

교회는 지금도 예배당으로 사용한다. 단상 옆엔 피아노와 드럼이 있었다. 장의자 10개가 2열 종대로 놓여 있었다. 장의자 사이, 예배당의 중간에 서서 박영순 목사가 설명했다.

봉화척곡교회 담임 박영순 목사.

“초기에는 남녀가 출입하는 문도 달랐고 앉을 때도 따로 앉았어요. 남녀석 가운데에 광목을 쳐서 설교자만 남녀 신자를 볼 수 있게 했답니다.”

드론으로 촬영한 사진으로 왼쪽 명동서숙과 오른쪽 예배당, 종탑이 있다.

지금도 예배당 측면 양쪽에 문이 있었다. 한쪽은 남성, 다른 쪽은 여성이 출입했고 이는 바깥쪽 솟을대문과 연결돼 있었다. 예배당 좌측 초가는 명동서숙이다. 숙식을 제공하면서 학문을 가르치던 교육기관으로, 지금은 작은 역사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명동서숙으로 교회의 역사자료 등이 전시돼 있다.

교회는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6년 문화재청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당회록(2호), 세례교인 명부, 척곡 장로교 면려회 회의록 등 소장 전적은 경상북도 문화재로 등재됐다.

봉화척곡교회는 독립운동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교회는 1907년 5월 17일 구한말 탁지부 관리를 지낸 김종숙이 세웠다. 그는 덕수궁에서 파견 근무를 하던 중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를 만나 기독교 신앙을 가졌고,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독립하려면 국민이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버리고 봉화로 낙향해 교회를 개척했다.

그는 봉화의 땅을 팔아 군자금과 의병대 지원금을 보냈고, 거기서 남은 돈으로 지방의 유지 최재구가 기증한 땅에 예배당과 명동서숙을 건축했다. 교회는 당시 독립운동하던 이들의 모임 장소요, 독립자금 전달 장소로 사용됐다.

독립운동의 거점 교회

일본강점기 때 일본 순사의 접근을 알기 위해 뚫어놓은 담장의 구멍.

길가 쪽 담장엔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일제 당시 일본 순사의 접근을 감시하는 구멍이라고 했다. 순사가 오면 설교자는 제단 옆문을 통해 뒷산으로 피신했다고 박 목사는 설명했다.

김종숙과 교회는 항상 일제의 감시 대상이었다. 교회는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에도 적극 참여했고 김종숙은 1920년 일제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해방 직전엔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됐고 명동서숙은 폐교됐다. 교인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광복 후 김종숙은 석방되고 공로목사로 추대되지만 1956년 별세 후 교회는 명맥만 유지했다. 그러다 2003년부터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김종숙 목사의 손자인 김영성 장로가 부친 김운학 장로의 “척곡교회를 잊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그해 6월 뉴질랜드에서 귀국해 교회를 정비했다. 2005년 5월 문화재추진위원회를 조직했고 2006년 국가등록문화재, 2007년 한국교회대부흥100주년기념교회로 지정됐다. 2015년 예배당을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시골교회이지만 현재 어른 성도 10여명, 초·중·고 아이들 20여명이 출석하고 있다. 아이들을 북미 비전트립에도 보낸다. 박 목사는 “한국의 근대사를 담고 있는 문화유산 봉화척곡교회와 선조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후손에게 잘 물려주는 것이 사명”이라며 “이를 위해 다음세대 사역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교회는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1910년 8월 29일 국치일을 잊지 말자며 매년 같은 날 ‘나라사랑음악회’도 진행하고 있다.



봉화=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