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최초의 연합기관이자 한국사회 인권운동의 첫걸음을 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총무 김종생 목사)가 올해 설립 100주년을 맞았다. NCCK는 지난 100년간 에큐메니컬(교회일치·연합) 정신과 기독교 가치를 바탕으로 한국사회의 불의·불법·부정에 맞서 저항했고 민주화·노동·여성·통일 운동에 앞장섰다. 하지만 용공 논쟁과 시민사회단체에 역할 이양, 전 세계적인 보수화 바람, 일선 교회와의 괴리 등으로 NCCK의 규모와 영향력은 축소됐다. 한 세기를 걸어온 NCCK의 발자취와 새롭게 나아가야 할 에큐메니컬 운동 청사진을 두 차례에 걸쳐 다룬다.
장로·감리교 연합이 시초
NCCK는 1924년 9월 24일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이름으로 창립됐다. 당시 한국 개신교의 주류였던 장로교와 감리회 연합을 목적으로 시작됐으며 ‘복음선전’ ‘사회 도덕의 향상’ ‘기독교 문화의 보급’ 등을 목표로 내세웠다. 1932년 발표한 ‘사회 신조’는 인권보장, 민중차별금지, 아동노동 금지, 여성 교육, 공창 폐지 등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사회 개혁과 실천 방안을 담아냈다.
NCCK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후 한국기독교연합회로 재건됐다. 한때 5·16쿠데타를 지지했으나 1970년 NCCK로 명칭을 바꾼 직후에는 삼선개헌을 반대하는 등 정체성을 명확히 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한 뒤 인권위원회(현 NCCK 인권센터)를 조직한 NCCK는 반고문·반폭력 인간선언대회 개최, 국가보안법 폐지 및 민족통일협의기구 구성 촉구,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명단 공개 운동 등을 활발하게 펼쳤다. 특히 민청학련 구속자들을 위한 기도회로 시작한 목요기도회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인혁당 희생자 가족 등 국가폭력과 유신독재에 맞선 이들의 든든한 방패막이였다.
‘시대적 사명’ 인권·통일운동 견인
손승호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사무국장은 2일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NCCK는 교회의 이익을 위한 협의회 성격에서 벗어나 사회 참여에 적극적인 목소리를 냈다 특히 인권위원회는 당시 폐허나 다름없던 한국사회에서 인권운동을 견인했다”고 평가했다. 이어 “초창기 인권위원회는 시민권에 관심을 두면서 민중의 생존권에는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추후 NCCK가 노동자 인권에 이어 환경운동까지 이어가는 데 영향을 미쳤고 오늘날 다양한 인권운동을 촉발하는 시대적 사명을 완수했다”고 분석했다.
이후 NCCK는 통일운동에도 박차를 가했다. 1986년 9월 스위스에서 NCCK 대표와 조선기독교도연맹 대표가 분단 이후 최초로 만났다. 2년 뒤에는 ‘88선언’으로 불리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이 채택됐다.
88선언에는 남북 분단 상황에 일조한 교회의 죄책을 고백하고 희년을 선포하며 7·4공동성명(1972년)을 지지한다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이는 6·15공동선언(2000년) 등 정부 통일정책의 근간이 됐다. 1989년 문익환 목사, 1992년 권호경 NCCK 총무가 김일성을 면담하는 등 활발한 교류가 이어졌다. 부활절과 광복절에는 남북공동기도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최근 들어서는 남북 관계가 경색되면서 명맥이 끊겼다.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연합운동
2000년대 들어서면서 NCCK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그동안 펼쳐 온 다양한 운동은 종교의 한계를 벗어나 전문 시민사회단체로 옮겨갔다. 활발하게 활동하던 지도자들도 빠져나갔다. 또 동성애를 비롯해 종교다원주의 논쟁의 중심에 서면서 일부 교단의 탈퇴 논란과 일선교회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차가운 시선도 감내해야 했다.
아울러 교계 보수연합기관이 힘을 얻으면서 NCCK 활동이 상대적으로 축소됐으나 세월호 및 핼러윈 참사 유가족 위로, 기후위기 극복 등 정의·평화·통일·일치 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김상근 전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은 “NCCK 100년 역사는 교회사에만 머무르는 게 아니라 민주화의 역사요 인권운동과 남북 냉전 시대 극복의 역사”라며 “과거에도 에큐메니컬 운동이 쉽지 않았으나 그 어려움을 이겨냈듯이 교회 지도자들과 젊은 목회자들이 현 상황에 맞서 싸워 돌파해 나갈 의무가 있다”고 격려했다.
박용미 기자 m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