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는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바로 인식과 걱정에 머무르지 않고 무엇인가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머리에서 시작해 손과 발까지 온전히 이어지려면 마음이라는 동기와 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을 우리는 ‘영성(靈性)’이라 부릅니다. 영성은 우리의 실천을 지속할 수 있게 만들며 더 깊은 차원으로의 변화를 끌어냅니다.
사실 많은 국가와 기업들이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고들 하지만 그들의 정치·경제적 원리나 과학적 접근만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불가능합니다. 수많은 이해관계 속에서 타협할 여지가 다분하기 때문입니다. 유명무실해진 탄소중립선언이 그 대표적 예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안일한 대응에 부족한 것이 바로 영성입니다.
그런데 종교는 영성을 기반으로 하며 세상은 종교에서 영성을 기대합니다. 바로 여기에 이 땅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마 6:10)를 위한 기독교의 역할이 있습니다. 정교분리의 원칙을 염려하는 분들도 계시겠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회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은 교회의 본질이며 사회를 위한 순기능인 동시에 사회의 일원으로서 교회가 지니는 마땅한 책무입니다.
기후위기 앞에서 우리 기독교가 가져야 할 영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이 세상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며 그분의 질서를 벗어날 때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임을 인식해야 합니다.(신 30:15) 기후위기와 생태계 파괴 앞에서 우리가 쌓아온 문명은 바벨탑처럼 허망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 앞에 우리는 마땅히 겸손해야 합니다.
둘째 과학의 발전과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맹신하는 것은 또 다른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습니다.(롬 1:25) 무한경쟁에 내몰려 피폐해진 삶,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비어있는 현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제외하고 스스로 구원을 성취하려는 태도는 그릇됩니다.
셋째 기독교는 이 위기에 큰 책임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발달이 서구 기독교 문화권에서 시작되었음을 기억하여 그 책임을 통감하고 회복을 위해 앞장서야 합니다.
넷째 우리는 언제나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마 5:13~14) 우리에게는 생활 속 소소한 노력에서부터 투표권과 소비권에 이르기까지 여러 방편이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의 노력이 미약해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노력도 귀하게 여기십니다.
다섯째 하나님께서는 홀로도 충분히 이 위기를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회개와 노력 없이 그분 홀로 우리가 자초한 이 위기를 해결해 주리라는 기대는 오히려 그분의 사랑을 배신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자유의지를 주셨고 당신의 전능함마저 내려놓으셨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없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없이 세상을 구원하시지 않으십니다. 고대 로마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야기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영성을 품고서 절박한 기도의 마음으로 깨어나 함께 실천을 이어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노력이 작고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우리 부족함을 깊은 탄식으로 채우시며(롬 8:26) 귀하게 쓰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사공병도 사제 (대한성공회 부산교구)
◇사공병도 사제는 대한성공회 부산교구 총무부장과 부산주교좌교회 보좌사제, 울산교회 관할사제를 지냈으며 현재 대한성공회 부산교구 교무국장으로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