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세에 접어든 1996년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는 질병이 찾아왔다. 바쁜 일정에 쫓기는 때라 건강에 대해 과신하면서 지냈다. 두 차례 장거리 운전을 한 뒤 화장실에 들렀는데 변기에 검붉은 피가 섞여 있는 것을 봤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나 따로 검진하진 않았다. 암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았고 일정이 바빴던 터라 치료 시기를 6개월 이상 놓친 것 같다.
집 근처 병원에 가보니 의사는 직장에 혹이 보인다고 큰 병원에서 정밀 진단을 받아보라고 했다. 대장의 혹에 대한 진단서를 들고 인하대병원을 찾았다. 내시경으로 들여다 본 담당 의사는 당장 입원하고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도 림프에 전이되기 직전 수술을 받아 다행이었다. 모든 스케줄이 순식간에 중단됐다. 당시는 숭실대 정규 수업 외에도 새문안교회의 언더우드 강좌 강연 약속이 잡힌 상태였다. 학교 수업과 외부 강연 스케줄을 취소하고 여러 검사를 마친 후 수술에 들어갔다. 강연은 취소할 수 있었으나 학교 수업은 3주나 휴강할 수 없어 숭실대 제자인 최태연 박사에게 부탁했다.
종양 제거 수술 후 2주간 회복 기간을 보내야 해 총 3주를 병원에서 지냈다. 나중에 아내를 통해 대장암 3기 말이란 진단이 나왔음을 들었다. 네덜란드에서 공부했던 선배 강유중 박사도 대장암으로 일찍 별세한 일이 있다. 하나님이 생명을 주관함을 믿으면서도 암으로 생명이 스러지는 걸 보며 인간의 무력함을 절실히 느꼈다. 암이 전이되기 전 수술을 받게해 준 주님 은혜에 감사할 따름이다.
암과의 투쟁에서는 그간 읽던 신학책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삶과 죽음의 문턱을 드나드는 이 기간엔 성경 말씀과 기도만 도움이 됐다. 특히 이 말씀이 와닿았다. “그가 내 힘을 중도에 쇠약하게 하시며 내 날을 짧게 하셨도다. 나의 말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주의 연대는 대대에 무궁하나이다.”(시 102:23~24) 암을 앓다 보니 암환자를 심방하거나 만날 때 깊이 위로할 수 있게 됐다. 하나님은 질병을 통해 나를 낮추고 성숙하게 하셨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시 107:10~11)
50년간 건강에 대해선 전혀 의식지 않고 살아왔으나 암 수술로 입원하고 보니 새로 생명을 받은 것처럼 느껴졌다. 새 삶을 허락한 하나님 은혜에 감사했다. 암은 향후 5년간 재발하지 않아야 완치된 것이라는 주치의 설명을 듣고 6개월에 한 번씩 병원에 가 검진을 받았다. 6개월마다 10번 병원을 다녔는데 의사가 이상없다고 할 때마다 감사가 나왔다. 5년 후에도 재발하지 않아 암에서 해방됐으나 건강에는 주의하게 됐다.
대장암 수술 후 25년이 경과한 지난 2021년, 서울대병원 강남보건원에서 아내의 권유에 마지못해 CT촬영을 했는데 초기 신장암이 발견됐다. 의사의 지시에 따라 제거 수술을 받았는데 25년 전보다 의술이 발전해 한 주 만에 정상 생활로 복귀했다. CT촬영으로 신장암을 조기에 발견하고 로봇 수술로 이를 제거한 데 감사하는 마음뿐이다. 육신 대신 주님을 신뢰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았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