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제장치 부족한 기업 합병… 동학개미 멍든다

입력 2024-08-26 02:31
게티이미지뱅크

계열사 간 합병을 통해 사업구조 개편에 착수한 SK그룹과 두산그룹이 예상외로 거센 주주 반발에 고초를 겪고 있다. 합병비율이 본래의 기업가치를 반영하지 못했거나 특정 기업에 불공정하게 산정됐다는 주주 불만이 커지면서다. 동일한 합병안을 해외에서 추진했다면 어땠을까. 외국에서는 합병을 기업 자율에 맡기면서도 이사회에 의사결정에 관한 사후 책임과 소액주주 보호에 대한 책임을 강하게 지운다. 전문가들은 기업이 계열사 간 합병을 추진하면서 주주의 재산상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유도하는 제도적 장치가 한국에는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자율에 따른 책임을 강화하는 식으로 한국의 기업 합병 제도를 재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25일 재계에 따르면 최근 국민연금은 SK이노베이션과 SK E&S 합병 관련 “합병비율을 고려했을 때 주주가치 훼손 우려가 크다”면서 반대 입장을 밝혔다. 합병비율은 합병회사 간 주식의 교환비율을 뜻한다. 합병비율에 따라 어느 회사 주주가 더 많은 가치를 인정받는지 가늠한다. SK이노베이션과 SK E&S의 합병비율은 1대1.1917417로 정해졌다. SK E&S 1주에 SK이노베이션 1.19주를 배정하는 식이다. SK이노베이션은 5529만9186주의 신주를 발행하게 되는데, 국민연금은 SK이노베이션 일반 주주들의 주식가치 훼손이 있을 것으로 봤다.

재계에서는 국민연금이 두산그룹의 계열사 간 합병에도 반대표를 던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두산은 두산에너빌리티의 자회사인 두산밥캣을 두산로보틱스로 이전해 100% 자회사로 만드는 지배구조 개편안을 추진 중이다. 두산은 이 과정에서 자본시장법에 따라 합병비율을 산정했다. 자본시장법에 따르면 합병가액은 두 회사 주가의 최근 1개월간 평균 종가, 최근 1주일간 평균 종가, 최근일 종가를 산술평균한 값인 기준시가로 정한다. 두산로보틱스의 주당 기준시가는 8만114원, 두산밥캣은 5만612원으로 계산되면서 합병비율은 1대0.63으로 결정됐다. 두산밥캣 등 일부 주주들은 불공정한 합병비율 산정이라며 반발했다. 적자 기업인 두산로보틱스와 안정적인 캐시카우 두산밥캣의 자본거래 과정에서 기업가치를 거의 동등하게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한국 기업들이 합법의 틀 안에서 합병비율을 정하고 있지만 합병 반대 여론이 일어나는 배경으로 ‘지배구조와 얽힌 합병’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을 꼽는다. 합병이 지배주주의 그룹 지배력을 강화하는 수단이 된 사례가 과거부터 이어졌다는 것이다. 지난 2015년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이 대표적이다. 당시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비율은 1대0.35로 산정됐다. 총수 일가 지분이 많은 제일모직에 지나치게 유리하게 합병비율이 산정됐다는 논란이 제기됐다. 2022년 상장법인 동원산업과 비상장법인 동원엔터프라이즈가 합병하는 과정에서도 총수 일가의 지분율이 90%가 넘는 동원엔터프라이즈에 유리한 합병비율이라는 비판이 거셌다. 당시 동원산업과 동원엔터프라이즈의 합병비율은 1대3.84이었다. 이창민 한양대 경영대학 교수는 “최근 논란의 중심이 된 한국 기업들의 합병은 대기업 집단 내의 계열사 간 합병이 대부분”이라며 “표면적으로는 합병을 통해 시너지를 내기 위한 것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지배주주의 그룹 지배력을 강화하는 것이 목적인 것처럼 여겨지면서 일반 주주와의 이해 상충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과 일본, 독일 등 주요국에서는 합병 결정 자체는 기업 자율에 맡기되 주주의 권한을 보장하고 사후 경영진 책임을 강화하는 규제를 둬 잡음을 줄이고 있다. 합병유지청구권, 합병검사인제도, 합병관계자의 손해배상책임제 등을 운영해 기업가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합병비율 산정을 막는 식이다. 일본은 기업 조직을 재편할 때 주주들이 사전에 유지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규정을 마련했다. 합병 등으로 불이익을 받을 염려가 있으면 주주는 회사에 합병 중지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미국도 기업 합병 거래가 반대 소수주주에게 명백하게 불리하다면 유지 권한 청구를 할 수 있는 제도를 운용 중이다.


독일은 완전 모·자회사 간 합병 외의 합병계약에는 합병검사인 선임을 의무화했다. 합병검사인은 대표이사가 신청하면 법원이 선출한다. 합병검사인은 회사가 사전에 제출한 자료를 토대로 합병비율의 산정 방법과 적정성 등을 평가한 뒤 서면 보고서를 작성한다. 제3자가 합병비율을 객관적으로 검토하도록 해 공정성을 높인 것이다. 독일은 이사에 대한 책임을 추궁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뒀다. 합병으로 소멸하는 회사의 경영진은 합병비율 결정 시 주주가 손해를 입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만약 이 주의 의무를 소홀히 해 주주가 손해를 입으면 주주는 경영진에 손해배상청구를 할 수 있다. 소수의 주주에게만 손해가 발생해도 경영진에 책임을 지울 수 있다.

반면 한국 상법에서는 이사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하면서도 회사에 손해가 발생한 경우에만 책임지도록 한다. 소수주주가 기업의 의사결정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권한이나 경영진에 책임을 지울 방법이 부족한 것이다. 금융위원회가 자본시장법을 개정해 기업 합병 과정에서 일반 주주 권익을 보호할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나섰지만 구체안은 올해 3분기 중에나 나올 예정이다. 황현영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해외처럼 기업이 합병 관련 공정성을 더 입증하기 위해 움직이도록 유도할 방안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미국에서 주로 활용되는 MoM(소수주주 다수결) 원칙을 도입하자는 목소리도 있다. MoM 원칙은 소액주주 중 다수의 동의를 받도록 하는 절차다. 김우찬 고려대 경영대 교수는 “MoM을 시행하면 이해 상충 사안이더라도 대주주는 주주 결의를 거쳤다는 절차적 공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성필 윤준식 기자 feel@kmib.co.kr